고구려왕계보4 -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을불 가계도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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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초까지 고구려는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 권력 투쟁과 서진(西晉), 선비족 등 외부 세력의 팽창에 직면했다. 중천왕과 서천왕은 왕실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숙신 등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며 체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봉상왕 대에 이르러 잦은 숙청과 실정으로 지배층 내 분열이 심화되었고, 이는 국상 창조리의 정변과 을불(미천왕)의 즉위로 이어졌다. 미천왕의 즉위는 고구려가 한반도 내 중국 군현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 고대 국가로서의 도약기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고국천왕 대의 진대법 시행 이후에도 기근과 부역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은 지속되었다.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 백성들은 귀족의 예속민이나 노비가 되었으며, 이는 귀족 세력이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확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비대해진 귀족 세력은 왕권과 대립하거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며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대외적으로는 위(魏)의 침공 이후 재건 과정에서 요동의 서진 및 선비족 모용부와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3. 전개

3.1. 중천왕의 치세와 권력 통제

248년 즉위한 중천왕은 동생 예물(豫物)과 사구(奢句)의 반란을 진압하며 왕위를 공고히 했다. 251년에는 소후(小后) 선발을 둘러싼 갈등 끝에 관나부인(貫那夫人)을 처형했다.*1 이는 왕후 세력인 연나부(掾那部)의 정치적 영향력과 왕실 내 위계질서가 엄격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59년에는 위나라 장수 위지개(尉遲楷)가 침공했으나, 중천왕은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정예 기병 5,000명을 동원해 이들을 격퇴했다.


3.2. 서천왕의 대외 정벌과 내부 숙청

270년 중천왕의 뒤를 이은 서천왕은 280년 숙신(肅愼)의 대규모 침입을 방어했다. 서천왕은 동생 달가(達賈)를 보내 숙신의 근거지를 점령하고 단로성(檀盧城) 등 변방 지역을 평정했다. 286년에는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을 처단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종친 세력을 제압했다. 서천왕 대의 이러한 조치는 왕실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재편의 일환이었다.


3.3. 봉상왕의 실정과 지배 체제의 균열

봉상왕은 즉위 직후 민심의 지지를 받던 숙부 달가와 동생 돌고(咄固)를 살해하여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했다. 293년과 296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을 방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298년 이후 지속된 가뭄과 기근 상황에서도 대규모 궁궐 증축을 강행했다. 국상 창조리가 백성들의 도탄을 근거로 공사 중단을 간언했으나 봉상왕은 이를 묵살했다. 결국 300년 창조리는 귀족들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폐위된 봉상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3.4. 소금장수 '을불'의 즉위(미천왕)

봉상왕의 탄압을 피해 도주한 돌고의 아들 을불은 수실촌(水室村) 고모로(高牟老)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거나, 압록강 일대에서 소금을 파는 등 고난을 겪었다.*3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는 을불이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겪은 구체적인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다.*4 창조리는 정변 이후 을불을 찾아내어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고구려의 왕 계보는 '을불'의 핏줄로 이어지는데, 이를 생각해보면 고구려 계보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과 및 평가

미천왕(을불)의 즉위 이후 고구려는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311년 서안평(西安平) 점령을 통해 요동과 한반도를 잇는 교통로를 차단했고,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을 차례로 병합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약 400년간 지속된 한반도 내 중국 군현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미천왕 대의 영토 확장은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물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소수림왕 대의 율령 반포와 광개토대왕의 대정복 사업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1. *1 관나부인이 처형된 '피낭(皮囊)' 방식은 가죽 주머니에 사람을 넣어 물에 던지는 북방 유목 사회의 관습법적 처형법이다. 이는 시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영혼의 안식을 부정하는 중죄인용 형벌이었다. 기록상 관나부인의 긴 머리카락(9척)은 미적 요소인 동시에 왕비 가문인 연나부(掾那部)의 권력 독점에 도전했던 신흥 총애 세력의 정치적 부상을 뒷받침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2. *2 국상 창조리가...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자는 갈대 잎을 머리에 꽂으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꽂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300년)

    정변 당시 가담자들이 머리에 꽂은 갈대 잎은 피아 식별을 위한 암구호였다. 이는 창조리가 주도한 국왕 폐위가 소수 권력자의 돌발 행동이 아니라, 귀족 연합체인 제가(諸加) 회의에서 사전에 합의된 집단적 결정이었음을 뒷받침한다.

    봉상왕이 자결한 뒤 고국원(故國原)에 매장한 조치는 왕실의 혈통 자체는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정변 후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려는 계산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3. *3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는 을불이 누구인지 몰라 몹시 고되게 부려먹었다. 밤이면 연못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니, 을불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1년 만에 떠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원년
  4. *4 미천왕의 고난사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이유는 정변으로 추대된 왕의 '정치적 서사' 구축과 관련이 깊다. 왕실의 정통성을 지녔으면서도 바닥 민심을 직접 체험했다는 기록은, 봉상왕을 폐위한 귀족 세력이 새로운 왕을 옹립하며 내세운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지금도 '서민 대통령' 같이 민중에 가까워 지면 대중의 마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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