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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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국천왕, 산상왕, 동천왕 시기는 신대왕 사후의 정국을 수습하고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이다. 고국천왕은 내부 반란 진압과 진대법 시행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산상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을 종식하고 부자 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천왕은 위(魏)나라 관구검의 침략을 겪었으나 가까스로 막아내며 체제를 유지 할 수 있었다.2. 배경
태조왕과 차대왕 시기를 거치며 고구려는 국상 명림답부 등 유력 귀족 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며 왕권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신대왕 대에 이르러 명림답부 주도로 정국이 일정 부분 안정되었으나, 고국천왕 즉위 시점에도 연나부 등 왕권을 위협하는 유력 부족 세력이 잔존하고 있었다.3. 전개
3.1. 고국천왕의 즉위와 체제 정비
고국천왕은 즉위 후 한나라 요동 태수의 침입을 방어했다. 내부적으로는 왕실 외척이자 명림답부 사후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연나부의 어비류와 좌가려가 주도한 반란을 진압했다. 연나부가 왕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고국천왕은 5부 세력들을 강하게 숙청한 것으로 보이고*1, 기존 5부와 연관이 없는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2하여 기존 귀족 세력을 견제하며 왕 측근 세력을 육성했다.이 시기 고구려의 기존 5부(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는 고유명칭 대신 방위명(동·서·남·북·중)을 사용하는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된 것으로 파악*3하고 있다. 이는 자율적인 부(部) 체제를 중앙집권적 통치 하에 편입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3.2. 진대법 시행
고국천왕 16년(194)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이 시행되었다.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빈민을 구휼한 사건을 계기로 진대법이 실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 학계는 진대법 시행의 주요 목적을 자영농의 몰락 방지와 귀족 세력 억제로 본다.*5 평민이 부채로 인해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면 국가의 세원과 병력이 감소하고 귀족의 사병이 증가하므로, 국가가 직접 빈민을 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3.3. 산상왕의 즉위와 왕실 재편
고국천왕 사후 형제인 산상왕이 즉위했다. 산상왕은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우씨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고, 우씨를 다시 왕후로 삼았다. 이는 부여와 고구려 일대에 존재했던 취수혼(형사취수제)의 기록적 근거로 인용된다.*6 즉위 직후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형 발기(發岐)가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했다. 이후 산상왕은 관노부 출신의 소후(小后)를 통해 후사(동천왕)를 얻었으며, 이 과정에서 우씨 왕후 측과의 정치적 갈등 기록이 확인된다.*7*83.4. 동천왕의 즉위와 위(魏)나라의 침공
산상왕의 아들 동천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의 왕위 계승은 본격적인 부자 상속 구도로 안착했다. 동천왕은 정실인 우씨 왕후의 친자가 아니라, 산상왕이 후궁으로 들인 관노부 출신 소후(小后)의 소생이었다. 산상왕 생전 우씨가 임신 중이던 소후를 암살하려 시도했을 만큼 두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은 극심했다.
이러한 배경 탓에,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우씨 왕후의 '국물 투척 사건'은 철저히 기획된 정치적 탐색전으로 해석된다. 우씨 왕후가 왕태자 시절의 동천왕 옷에 고의로 국물을 쏟는 무례를 범한 것은, 훗날 왕위에 오를 그가 생모의 암살 미수 건을 구실로 자신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할지 확인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이 시험에서 동천왕이 평정을 유지하며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우씨 왕후는 보복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차기 국왕으로 온전히 인정했다고 보인다.
동천왕 16년(242), 고구려는 요동과 낙랑을 잇는 군사 요충지인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4] 이에 반발한 위나라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한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고 동천왕은 북옥저로 퇴각했다.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추격해오자, 밀우(密友)와 유유(紐由) 등의 장수들이 결사대를 이끌고 적진에 투항을 위장해 적장을 암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워 위군을 철수시켰다.*9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도망가야만 했던 고구려 역사상 첫 국가 위기를 무사히 벗어난 것이다.4. 결과 및 평가
고국천왕 대의 연나부 반란 진압과 진대법 시행, 5부 체제 개편은 고구려 중앙집권화의 행정적 토대가 되었다. 산상왕 대에는 발기의 난을 극복하고 부자 상속을 통한 왕실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동천왕 대의 관구검 침입 방어는 수도 함락이라는 타격을 받았으나, 조직적인 대응으로 국가 해체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리하자면, 이 세 왕의 시기는 고구려가 지배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 통치력을 고도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
5부 명칭 표기 방식이 변화한 시점은 유력 귀족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직후와 정확히 맞물린다. 방위명이 등장하기 1년 전인 고국천왕 12년(190), 왕실 외척이자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던 연나부의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고국천왕이 이 반란 진압을 기회로 각 부(部)가 지니고 있던 군사적·재정적 자치권을 박탈하고, 국왕을 중심축으로 한 방위 구역으로 행정망을 덧씌워 귀족들을 통제 가능한 중앙 관료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
*2
을파소의 등용은 단순 인재 발탁이 아닌, 기득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고국천왕의 정치적 승부수로 보인다.
서압록곡(西鴨淥谷)에서 농사를 짓던 은둔 지식인 출신을 국상 자리에 앉힌 것은, 기존의 정치 질서에서 벗어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는 뜻이 강했을 것이다. -
*3
고구려의 5부가 고국천왕 대를 기점으로 독자적 부족 기반에서 행정적 방위명(동·서·남·북·중부)으로 개편되었다는 해석은 노태돈의 「삼국시대 '부(部)'에 관한 연구」(1975)에서 제시된 이래 한국 고대사 학계의 확고한 통설로 자리 잡았다. 이후 김현숙의 「고구려 전기 나부통치체제의 운영과 변화」(1995)와 임기환의 『고구려 정치사 연구』(2004) 등을 통해 그 권력 재편 과정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학계가 고국천왕 대를 개편의 기점으로 특정하는 결정적 근거는 《삼국사기》 내 출신지 표기 방식의 변화다. 사료를 교차 검증해 보면, 고국천왕 2년(180) 기사까지는 왕후 우씨의 출신을 전통 부족명인 '연나부(椽那部)'로 기록하지만, 연나부 주도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직후인 고국천왕 13년(191) 기사에서는 관료 안류(晏留)의 출신지를 '동부(東部)'라는 방위명으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반란 진압을 계기로 각 부의 대가(大加)들이 쥐고 있던 군사·재정적 자치권을 박탈하고 이들을 중앙 관료로 예속시킨 행정 통폐합의 증거로 파악한다. -
*4
보통 진대법을 '을파소'가 건의하여 시행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그런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을파소가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인 '국상(國相)'을 역임하고 있었기에 진대법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
*5
표면적인 형사취수제 이면에는 우씨 왕후의 강력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국천왕 사망 직후 우씨는 왕의 죽음을 숨긴 채 첫째 동생인 발기(發岐)를 먼저 찾아갔으나 밤늦게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았다.
이후 우씨는 둘째 동생인 연우(산상왕)를 찾아가 지지를 약속하며 그를 왕위에 올렸다. 이는 당시 왕위 계승권을 연노부가 결정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데, 그만큼 이때까지만해도 전제왕권이 확보되지 못한 것을 잘 보여준다. - *6 고구려와 부여 일대의 형사취수제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 원전은 중국 서진(西晉) 시대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 조다. 해당 문헌에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흉노의 풍속과 같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라고 명시되어 있다. 중국 측 사료가 북방 사회의 풍습을 법제적으로 규정한 기록이라면,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내 산상왕과 우씨의 결합 기사는 이 제도가 국가 최상위 지배층에서 실제로 작동했음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교차 검증 사료로 쓰인다.
- *7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우씨 왕후는 산상왕이 주통촌(酒桶村)의 여인(소후)을 임신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즉각 군사를 보내 그녀를 베어 죽이려 했다. 당대 최고 권력을 쥐고 있던 우씨 왕후 세력(연나부 추정)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비(非)주류 세력의 후계자가 등장하는 것을 무력으로 제거하려 한 노골적인 정치 테러 시도였다.
-
*8
소후는 우씨 왕후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암살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향해 "내 뱃속에 있는 것은 왕의 핏줄인데 네놈들이 감히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호통을 쳐서 이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국왕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정통성을 무기 삼은 신진 세력(관노부)이 기존 기득권 세력의 겁박에 정면으로 맞서 방어에 성공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후 산상왕이 이를 명분 삼아 소후를 정식으로 궁에 들이면서 절대적이었던 우씨 왕후의 권력은 분산되고 새로운 부자 상속 체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 *9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은 고구려의 도성이 함락당한 치명적인 군사적 위기였다. 당대 정사 기록에 따르면, 장수 유유(紐由)는 위나라 진영에 거짓으로 항복하며 접근한 뒤, 음식을 담은 식기 속에 숨겨둔 칼을 뽑아 적장을 찌르고 본인도 함께 자결했다. 지휘관을 잃은 위나라 군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고구려군이 반격하여 퇴각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