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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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6대 태조왕은 7세에 즉위하여 옥저 복속과 요동 진출을 통해 영토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7대 차대왕의 통치 방식은 연나부 출신 명림답부의 정변을 초래했고, 8대 신대왕 즉위와 함께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 체제가 수립되었다. 6대 왕임에도 '태조(太祖)' 혹은 '국조(國祖)'라는 묘호가 부여된 사실은 『삼국사기』 초기 기년 문제와 더불어 고구려 초기 왕계 및 지배 세력 재편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쟁점이다.2. 배경
초기 고구려는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의 5부 연맹체 성격을 띠었다.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시기를 거치며 주변 소국을 병합했으나, 국가 권력이 왕실에 온전히 집중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무신왕 사후 민중왕과 모본왕 대에 이르러 왕위 계승의 혼란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모본왕 피살 이후 국인(國人)들은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再思)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재사가 고사하여 그의 아들 궁(宮)이 7세의 나이로 6대 태조왕에 즉위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5부 연맹 체제 내에서 계루부 왕실의 지배력이 과도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3. 전개
3.1. 태조왕의 대외 팽창과 기년 논쟁
태조왕은 즉위 초 부여 태후의 섭정을 거쳐 친정한 후 대외 팽창에 주력했다. 56년 동옥저를 정벌하여 공납을 징수함으로써 동해안의 소금과 해산물 등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다. 68년 갈사국을 병합하고 72년 조나국, 74년 주나국을 복속시켜 압록강과 혼강 유역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후한(後漢)과의 군사적 충돌도 본격화되었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한 이래, 121년에는 후한의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의 침공을 방어하고 선비족과 연합하여 요수 일대를 타격했다.『삼국사기』는 태조왕이 94년간 재위하고 119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 동이전 역시 고구려 왕 '궁(宮)'이 장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중 양국의 사료가 태조왕이 '장수'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생물학적 수명의 한계로 인해 학계는 이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1
3.2. '태조' 묘호와 왕계 재편설
6대 왕에 부여된 '태조' 및 '국조'라는 묘호는 학계의 주요 쟁점이다. 통상적인 건국 군주의 묘호가 중기 왕에게 적용된 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지배 집단 교체설: 1~5대 왕(동명성왕~모본왕)은 사서에 해씨(解氏)로 기록되거나 부여계의 성격을 띠는 반면, 태조왕부터는 고씨(高氏) 성이 확립된다. 이를 근거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가설이 제기된다.*2
◎ 방계 혈통 즉위설: 해씨와 고씨를 동일 집단으로 간주하되, 직계가 단절되고 재사-궁으로 이어지는 방계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왕계의 시조로서 '태조'를 표방했다는 해석이다. 이와 연결해서 태조왕의 뒤를 이은 7대 차대(次大)왕과 8대 신대(新大)왕의 묘호 역시 태조왕을 1세대로 설정하고 왕호를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3
3.3. 차대왕의 치세와 명림답부의 정변
태조왕의 동생으로 기록된 수성(遂成)은 146년 7대 차대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성은 즉위 전 태조왕의 측근인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했고, 즉위 후에는 태조왕의 장자인 막근(莫勤)을 숙청하여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연나부(절노부) 등 귀족 세력의 반발이 발생했다. 165년 연나부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荅夫)가 정변을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했다.*43.4. 신대왕 옹립과 국상 체제의 성립
정변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백고(伯固)를 8대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백고가 태조왕과 차대왕을 모두 죽이고 즉위했다고 기록하여, 명림답부 단독 정변으로 서술한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인다.*5 이는 신대왕 즉위 과정에 백고 세력의 직접적인 무력 개입이 존재했을 가능성*6이 있었음을 짐작케한다.신대왕은 즉위 후 명림답부를 신설 관직인 국상(國相)에 임명하고 국정을 위임했다. 기존 최고 관직인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대체한 국상은 귀족 세력의 대표로서 왕권을 견제하고 행정을 총괄했다. 172년(신대왕 8년)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하자, 명림답부는 성문을 닫고 농성하는 청야전술로 한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은 뒤 퇴각하는 적을 좌원(坐原)에서 기습하여 방어에 성공했다.*7
4. 결과 및 평가
태조왕 대의 정복 활동은 주변 소국을 병합하여 5부 연맹체의 중심축을 계루부 왕실로 집중시켰다. 차대왕의 피살과 신대왕의 즉위 과정은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발생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충돌 양상을 보여준다. 명림답부가 초대 국상으로 취임하며 확립된 국상 제도는 고구려의 정치 운영 시스템이 귀족 연립 체제의 틀 속에서 안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시기 묘호의 변화와 지배 체제의 정비는 고구려가 고대 국가로서의 중앙 통치 구조를 완비해 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1
이 119세 장수 및 94년 재위 기록을 고구려 왕실 주도의 '기년 끌어올리기' 작업 결과물로 본다.
후대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라와 백제의 건국 연대가 소급되자, 이에 대항하여 국가적 자존심과 부여계 내에서의 정통성 우위를 점하기 위해 태조왕의 치세를 무리하게 늘렸다는 해석이 주류다.
최근에는 '궁(宮)'이라는 이름이 개인의 아명이 아니라 여러 대의 왕이나 특정 지배 가문을 통칭하는 명칭이었으며, 이를 후대에 단일 왕의 기록으로 압축하면서 연대가 왜곡되었다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
*2
초기 왕들의 성씨인 '해(解)'가 부여어계로 태양을 의미하고, 태조왕부터 쓰인 '고(高)'가 높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두 성씨가 사실상 같은 뜻을 지닌 표기상의 차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혈연 단절 여부와 무관하게, 태조왕 즉위 과정에서 5부 연맹의 주도권이 전면 교체되는 수준의 대규모 피바람이 불었다는 점에는 학계의 이견이 적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세운 계루부 왕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국자에 버금가는 '태조(太祖)'라는 파격적인 묘호를 차용하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
*3
이들의 왕호는 '차대(次大)'나 '신대(新大)'라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차(次 : 보통 두 번째를 의미) + 대왕(大王)'과 '신(新) + 대왕(大王)'으로 끊어 읽어 보자.
태조대왕(太祖大王)을 절대적 기점으로 삼아 '태조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대왕(차대왕)', '정변으로 즉위한 새로운 대왕(신대왕)'이라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부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처음 시를 사용해 진의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다) 사후, 2대 황제가 스스로를 '이세황제(二世皇帝)'라 칭한 것과 유사한 작명법이다.
일부에선 이를 보고 단순 서열 표기를 넘어, 1~5대 왕계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태조왕을 실질적인 고씨 왕조의 시조로 확립하기 위해 계루부 왕실이 고안해 정치적 명명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
*4
차대왕이 즉위 전후로 태조왕의 측근 고복장과 장자 막근을 연이어 살해한 것은 단순한 폭정이라기보다, 태조왕계 구(舊) 주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철저한 정치적 숙청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 연나부 출신 조의 명림답부가 나섰다는 것은, 계루부 왕실의 독주에 위기감을 느낀 타 부족 귀족들이 연합하여 차대왕의 왕권 강화 시도에 물리적 제동을 건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
*5
야사 및 설화에 따르면, 신대왕(백고)은 산중에 은거하다 추대된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실제로는 정변의 핵심 막후였다는 썰이 존재한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백고가 태조왕과 차대왕을 모두 죽였다고 명시한 부분은, 당시 별궁에 물러나 있던 100세가 넘은 태조왕 역시 자연사가 아니라 백고 세력이 주도한 권력 재편 과정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즉, 신대왕이 왕위 찬탈의 도의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시해의 모든 책임을 명림답부에게 돌리고 자신은 철저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는 다분히 현실 정치적인 해석이 뒤따른다. -
*6
신대왕(백고)의 가계에 대해 『삼국사기』는 태조왕의 이복동생으로 기록하나, 태조왕 즉위(53년)와 신대왕 즉위(165년) 사이의 물리적 시간 간극으로 인해 현재 학계에서는 이들을 형제 관계로 간주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백고를 태조왕의 손자뻘 되는 방계 혈족으로 추정하며, 왕실 내부의 세대교체와 가문 교체가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
*7
명림답부의 국상 취임은 고구려 관제 개편을 넘어, 왕에게 집중되던 권력을 귀족 연합이 회수하는 과정이었다.
차대왕의 극단적인 숙청 작업으로 생존에 직격탄을 맞았던 5부 귀족들이 정변 성공 직후, 왕조차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최고 권력직을 신설해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게 한 일종의 제도적 견제 장치였다.
좌보와 우보로 나뉘어 있던 권력을 '국상' 1인에게 집중시킨 것은 전시 상황에서 귀족 연합체의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기 위한 군사·정치적 타개책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