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가계도 알아보기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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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중의 보편적인 인식과 달리, 고종은 조선 왕실의 확고한 정통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의 가계는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7대손으로, 소현세자나 효종의 직계와는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특히 숙종 대에 터진 '삼복의 옥' 사건은 이 가문표 역사에 치명타였다. 비록 흥선군의 직계 조상인 복녕군은 일찍 병사하여 직접적인 화를 면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가문 전체가 중앙 정치에서 철저히 밀려나며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그림자 같던 변방의 방계 가문이 어떻게 조선 왕통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 남연군, 사도세자 핏줄로의 입적

이 방계 가계에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난 시점은 1815년(순조 15년)이다. 본래 이름이 '이채중'이었던 흥선군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공식 입적된 것이다. 이는 아들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은신군의 제사를 잇기 위한 왕실의 조치였다.


이 입적을 통해 이름을 '이구(李球)'로 고치고 '남연군'에 봉해졌으며, 조선 왕실 족보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법적 후손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왕실 변두리에 머물던 가계의 법적 지위와 위상이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이제 역사의 시선은 법통을 이은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을 향하게 된다.*1

3. 파락호의 생존 전략, 왕 만들기

은신군의 법통을 이은 이하응 역시 '흥선군' 작호를 받으며 종친 내에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했다. 하지만 흥선군은 당시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의 매서운 견제를 피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철종 말기까지 이른바 '파락호' 행세*2를 하며 철저히 바닥에 엎드려 가문의 생존을 도모했다.


이후 헌종과 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조선 왕실에는 직계 혈통이 끊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사도세자의 법통을 잇고 있던 흥선군 가계가 법적, 혈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남연군이 양자에 입적한게 처음부터 왕위를 노린 치밀한 계획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왕실 혈통의 단절이라는 위기가 결국 고종의 즉위까지 이어지며 양자 입적이라는 작은 사건이, 조선 말기 정치 질서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셈이 되었다.


  1. *1 흥선군이 넷째 아들임에도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경쟁자의 부재와 치밀한 계산 덕분이다.

    먼저,형들의 상황은 이렇다.
    - 첫째 흥녕군: 후사 없이 일찍 병사
    - 둘째 흥완군: 1848년에 이미 사망
    - 셋째 흥인군: 성품이 유약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음

    여기에 수렴청정으로 실권을 쥐려던 조대비(신정왕후)의 이해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당장 친정이 가능한 19세 흥선군의 장남 이재면 대신, 수렴청정에 딱 맞는 12세 차남(고종)을 내세워 막후 밀약을 맺은 것이다.
  2. *2 사실 흥선군이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고자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상갓집 개'나 '파락호' 행세를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 야사와 소설(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에 의해 극적으로 과장된 픽션에 가깝다.

    실제로는 종친으로서 합당한 예우를 받으며 안동 김씨 유력자들과도 교류했고, 예술(묵란)에 매진하며 정치적 야심을 숨기는 방식을 택했다. 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경계심을 늦춘 틈을 타 조대비 세력과 물밑 교섭을 진행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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