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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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하대는 흔히 혼란과 내전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대가 시작되는 초기, 특히 선덕왕과 원성왕 시기의 왕위 쟁탈전은 후대의 양상과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 이 시기는 100여 년간 이어진 무열왕 직계 혈통이 단절되고 내물왕계가 다시 왕위에 오르면서, '누가 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정통성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였다. 원성왕의 즉위는 이후 통일신라 왕실 내에서 왕위 계승권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 배경
통일신라 중대는 강력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러나 평화가 길어지면서 진골 귀족 세력의 권한이 점차 비대해졌고, 왕권과의 갈등은 불가피해졌다. 결국 36대 혜공왕 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반란인 '김지정의 난'이 발생했고, 혜공왕은 이 난의 와중에 피살되고 만다. 혜공왕의 죽음은 곧 통일신라 중대의 안정을 지탱하던 '무열왕 직계 혈통의 단절'을 의미했으며, 이는 이후 길게 이어질 신라 하대의 혼란을 알리는 서막이었다.*13. 전개
3.1. 신라 하대 개막과 선덕왕의 즉위
혜공왕이 피살된 직후,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김양상(선덕왕)이 37대 왕으로 추대*2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핏줄이다. 그는 부계로는 내물왕의 10대손인 전형적인 내물왕계 귀족이었으나, 모계로는 무열왕계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성덕왕의 딸(사소부인) 소생이었다. 즉, 선덕왕은 양쪽 핏줄을 모두 물려받았기에 혜공왕 사후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에서 무열왕계와 내물왕계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납득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정국을 수습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3.2. 선덕왕 사후의 왕위 계승 구도
그러나 선덕왕은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명확한 후계자마저 지정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핵심 자격은 혈통적 정통성이었다. 무열왕의 직계가 이미 끊어지고 선덕왕마저 사망하자, 왕위 계승 후보의 범위는 무열왕의 방계 후손들로 좁혀졌다. 이때 귀족 회의를 통해 왕위 1순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무열왕의 방계(둘째 김인문 또는 셋째 김문왕의 후손)인 진골 귀족 '김주원'이었다.3.3. 무열왕계 김주원과 내물왕계 김경신의 경쟁
김주원과 왕위를 놓고 경쟁한 인물은 '김경신'이다. 원성왕은 내물왕계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때 내물왕계는 광의의 김씨 왕족을 의미한다. 무열왕계 역시 내물왕의 후손이므로 넓게 보면 내물왕계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원성왕의 혈통은 내물왕의 먼 후손으로, 무열왕계가 왕위를 독점해온 통일 신라 시기에는 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핏줄이었다. 즉, 무열왕의 방계 후손인 김주원이 직계가 단절된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무열왕계의 방계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귀족 회의에서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 날, 갑작스러운 폭우로 경주 북쪽의 알천(북천)이 크게 범람한 것*3이다. 강북에 살던 김주원이 거센 물살에 막혀 왕궁으로 건너오지 못하자, 권력 서열 2위였던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궁궐로 입성해 버렸다. 김경신 지지세력은 "하늘이 비를 내려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게 한 것은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없음을 뜻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습적으로 왕위를 차지했다.
3.4. 원성왕의 즉위와 계승 원칙의 변화
권력을 장악한 38대 원성왕(김경신)은 부계 혈통으로 따지면 내물왕의 12대손이었다. 이는 무열왕계가 왕위를 독점해 온 지난 100여 년의 기준에서 보면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핏줄이었다. 원성왕의 즉위는 신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4 무열왕의 직계가 아니더라도 세력과 기회만 있다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굳건하게 유지되던 왕위 계승의 전통적인 기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4. 결과 및 평가
결과적으로 원성왕의 즉위는 이후 통일신라 왕실 내에서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일상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혈통적 자격의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훗날 원성왕의 후손들은 물론 힘을 가진 진골 귀족들이 저마다 명분을 내세워 권력 다툼에 뛰어들었다. 통일신라 중대의 안정을 지탱하던 무열왕계 중심의 왕위 계승 구조는 원성왕의 즉위를 기점으로 붕괴하였고, 신라는 본격적인 귀족 연합 체제와 하대의 혼란기로 접어들게 되었다.*5-
*1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왕의 혈통에 따라 상대(박·석·김 교대), 중대(무열왕 직계), 하대(내물왕 방계)로 엄격하게 구분한다.
즉, 혜공왕의 죽음은 왕의 암살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무열왕계 강력한 전제왕권을 상징으로 하는 신라 중대가 종말을 고하고, 왕권이 파편화되는 새로운 시대(신라 하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역사적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
*2
신라의 철저한 신분제인 골품제 사회에서는 부계 못지않게 모계의 혈통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김양상(선덕왕)이 내물왕계임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명분은, 그의 어머니가 신라 전성기의 성군인 '성덕왕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권력의 축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귀족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택된 고도의 '정치적 타협'으로 해석한다. -
*3
학계에서는 이 '알천 범람 사건'을 자연재해가 아니라, 김경신(원성왕) 세력이 치밀하게 준비한 정치적 쿠데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폭우로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것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표면적인 핑계(신화적 윤색)일 뿐, 실제로는 김경신 파가 선제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궁궐을 장악하고 김주원 세력의 진입을 무력으로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4
부계 중심 사회에서 '12대손'이라는 촌수는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는 아주 까마득한 방계 혈통이다. 무열왕 직계(혹은 매우 가까운 친척)가 아니면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없었던 중대와 비교하면 파격적인 결과였다.
이는 곧 "힘과 사병(私兵)만 있다면 진골 귀족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선례가 되었고, 결국 신라 하대 150여 년 동안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
*5
한편,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숙청당하는 대신 자신의 연고지인 명주(현재의 강릉)로 물러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김주원은 그곳에서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불리며 사실상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처럼 지역을 다스렸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처럼 중앙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귀족이 지방으로 내려가 거대한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중앙 집권이 무너지고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신라 하대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