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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흔히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주조된 거대한 범종이다. 이 종은 그의 아들인 35대 경덕왕 대에 제작이 구상되어, 손자인 36대 혜공왕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대중에게 이 종은 선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불교식 '종'이나 애틋한 '전설'*1을 간직한 문화재 정도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거대한 종의 주조 이면에는 통일신라 중대 왕실의 팽팽한 정치적 긴장감이 얽혀 있다. 결론적으로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중대의 강력했던 전제왕권을 상징하는 최후의 기념비인 동시에, 무열왕계 직계 혈통의 쇠퇴와 신라 왕권의 몰락을 묵묵히 증언하는 역설적인 유물이다.
2. 배경
성덕대왕신종 건립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직전, 신라는 삼국통일의 상처를 온전히 극복하고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33대 성덕왕의 치세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와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황금기였다. 삼국을 통일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확고한 혈통적 정통성은 신라 왕권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성덕왕은 이를 바탕으로 흔들림 없는 전제왕권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길어진 평화는 역설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이 다시금 힘을 기를 수 있는 온상이 되었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체제가 안정되자, 왕권에 억눌려 있던 귀족들은 서서히 기득권을 확대하며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이 거대한 정치적 균열은 성덕왕의 뒤를 이은 경덕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왕실과 귀족 간의 노골적인 권력 투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3. 전개
3.1. 성덕왕 치세와 동아시아의 태평성대
성덕대왕신종의 표면에는 1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기록에는 성덕왕이 불교를 널리 장려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성덕왕의 위대한 공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 거대한 종을 주조했다는 극진한 칭송이 담겨 있다. 실제로 성덕왕의 치세(702~737년)는 통일신라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찬란했던 태평성대로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삼국이 모두 전쟁의 상처를 씻고 번영을 누리던 보기 드문 '대평화 시대'*2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무열왕과 문무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막강한 혈통적 명분을 내세워 전제왕권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적어도 성덕왕이 다스리던 시기까지 신라의 왕권은 그 어떤 귀족도 감히 도전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3.2. 경덕왕의 왕권 강화 시도와 귀족 세력의 반발
성덕왕의 아들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랜 평화는 필연적으로 귀족 세력의 팽창을 초래했다. 당대 귀족 세력의 힘이 비대해지자, 경덕왕은 흔들리는 왕권을 다잡기 위해 강력한 견제와 개혁 정책을 동시에 추진해야만 했다.
경덕왕은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첫 번째 왕비인 삼모부인의 폐위다. 공식적인 명분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無子)'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막강한 외척 세력이었던 장인 김순정 일파*3를 정계에서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였다. 삼모부인을 폐위한 직후, 경덕왕은 신라 최대 규모(약 49만 근)의 '황룡사 대종'*4을 국가적 차원에서 직접 주조하여 시주했다. 이는 외척 진골 귀족을 꺾은 뒤, 자신의 공고해진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막대한 물량을 투입한 거대한 상징물이었다.
경덕왕은 행정 체계 개편을 통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전국의 지명 및 관직명을 중국식 한자로 통일하는 이른바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중앙 정부 중심의 일원화된 체계를 구축하여, 지방 호족들에게 국가의 질서를 강요하고 행정을 강력히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더불어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하는 등 대규모 국가 불사를 일으켜 불교의 권위를 빌려 왕권을 신성화했다. 즉, 불국사와 석굴암은 단순 종교 시설이 아니라 강력한 전제왕권을 외부에 표출하는 거대한 정치적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덕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과거 신문왕 대에 폐지되어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녹읍(祿邑)을 귀족들의 강력한 요구에 밀려 결국 경덕왕 16년(757년)에 부활시키고 만 것이다. 녹읍의 부활은 귀족 세력에게 다시금 독자적인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내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이 서서히 한계에 부딪히며, 귀족 연합 체제로 권력의 추가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3.3. 성덕대왕신종 제작의 정치적 배경
위에서 언급된 일련의 흐름을 종합하면, 성덕대왕신종의 제작 역시 단순한 '효심'이 아니라 '왕권 강화'라는 절박한 정치적 목적을 띤 수단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녹읍 부활 등으로 귀족 세력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경덕왕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태평성대를 이룩했던 아버지 성덕왕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고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당시 거대한 종을 주조하는 작업은 국가의 막대한 재정과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거국적 프로젝트였다. 경덕왕은 이러한 거대한 종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왕권이 아직 건재함을 대내외에 선포하려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덕대왕신종은 선왕을 기리는 추모의 의미를 넘어, 흔들리는 왕권을 다잡고자 했던 경덕왕의 강렬한 의지가 투영된 정치적 상징물이었다.
4. 결과 및 평가
왕권 수호라는 벅찬 숙제를 안고 시작된 성덕대왕신종 주조는 경덕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36대 혜공왕 7년(77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종이 완성된 기쁨도 잠시,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혜공왕은 재위 내내 거세진 진골 귀족들의 반란과 끔찍한 권력 투쟁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780년, 혜공왕이 반란군(김지정의 난)의 칼에 피살되면서 자랑스럽던 무열왕계의 직계 혈통은 참혹하게 단절*5되고 만다.
성덕대왕신종은 통일신라 중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전제왕권의 위용을 증명하는 걸작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가 완성되어 울려 퍼진 시점은 이미 무열왕계의 권력이 회복 불능의 상태로 저물어가던 비극의 황혼기였다. 세상을 진동시키는 그 아름답고도 애절한 종소리 속에는 강력한 왕권을 되찾으려 했던 신라 국왕들의 처절한 염원과, 끝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며 무너져 내린 신라 왕실의 비극적인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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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에게는 아이를 끓는 쇳물에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 전설'로 유명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성분 분석 결과 종에서 사람 뼈의 성분인 인(P)은 검출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종을 만들 때 그만큼 백성들의 고혈(가혹한 세금과 노동력 징발)을 짜냈음을 원망하는 민중들의 비극적인 정서가 후대에 설화로 윤색된 것으로 본다. -
*2
당시 중국 당나라는 현종 치세 전반기의 이른바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는 최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일본 역시 율령 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나라(奈良) 시대'의 평화기였다.
즉, 8세기 전반 동아시아 3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활발한 문화 교류와 무역을 통해 각자의 국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던 시기였으며, 성덕왕 역시 이러한 국제적 호기를 영리하게 활용하여 국가의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
*3
김순정은 신라 중대 최고위 관직인 '중시(中侍)'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다. 그의 딸(삼모부인)이 경덕왕의 첫 정비가 될 정도로 왕실과 깊게 밀착되어 있었으며, 왕권마저 위협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경제력과 사조직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경덕왕 입장에서 김순정 가문은 전제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진골 귀족 카르텔'의 상징과도 같았다. 삼모부인 폐위는 곧 왕권에 도전할 여지가 있는 가장 거대한 외척 세력의 날개를 꺾어버린 일대 정치적 사건이었다. -
*4
경덕왕이 주조한 황룡사 대종에 들어간 구리의 양은 무려 49만 7,581근에 달했다. 이는 우리에게 '에밀레종'으로 친숙한 성덕대왕신종(약 12만 근)보다 무려 4배나 무거운, 신라 역사상 압도적인 최대 규모다.
경덕왕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종이지만, 아쉽게도 현재 그 모습은 볼 수 없다. 훗날 고려 시대인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 9층 목탑 등 사찰 전체가 잿더미가 될 때 함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는 몽골군이 이 거대한 종을 전리품으로 챙겨 배에 싣고 가려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경주 문천 혹은 형산강)에 빠뜨렸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5
한국 고대사에서는 무열왕부터 이 혜공왕까지의 시기를 '신라 중대(中代)'로, 혜공왕 사후 방계 왕족들(내물왕계 등)이 서로 왕이 되겠다며 150여 년간 피 튀기는 내전을 벌이는 쇠퇴기를 '신라 하대(下代)'로 구분한다.
즉, 성덕대왕신종의 완성은 곧 화려했던 통일신라 전성기(중대)의 완전한 종말을 알리는 마침표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