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10 - 영조 가계도, 사도세자 가계도로 알아보는 임오화변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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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가계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조선 역사에서 사도세자만큼 다양한 시선이 뒤엉킨 인물은 드물다.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의 왕세자라는 뻔한 시선으로 바라볼 대상이 아니란 이야기다.


사도세자가 왜 그토록 불안했고 왜 끝내 무너졌는지를 살피려면, 아버지 영조의 그림자를 반드시 들춰봐야 한다. 사람들은 영조를 성군이라 치켜세우지만, 실상은 아들을 파멸로 몰고 간 원인 제공자였다.


영조의 완벽주의자 기질의 원인은?

영조는 42세(1735년 영조 11년)에 뒤늦게 사도세자를 얻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기대와 애정이 컸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元子)로 정해졌고, 2세가 되던 해에 정식으로 왕세자에 책봉*1되었다는 점이 영조의 마음을 짐작케 한다.


사도세자는 이미 두 살 때부터 글자을 알았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세 살 때 이미 《효경》을 읽기 시작했을 정도라 한다. 영재의 싹수가 보이자, 영조는 수시로 아들을 불러 "방금 읽은 책의 내용을 외워보라"고 시켰고, 대답이 조금만 늦어도 신하들 앞에서 크게 꾸짖었다 한다.


영조는 왜 이렇게 사도세자를 몰아붙였던 걸까? 그 이유는 평생의 콤플렉스와 관련이 깊다. 본인이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2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경종 독살설이라는 정치적 의혹이 영조를 평생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자신의 콤플렉스와 어린 아들을 몰아세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영조가 처한 정치 상황의 냉혹함을 생각해보자. 소론은 끊임없이 영조의 왕위 찬탈 의혹을 제기했고, 심지어 이인좌의 난*3이라는 반란까지 있었다. 영조는 이런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직 본인이 완벽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스스로 군왕으로서 흠잡히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통제했고, 탕평책을 내세워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영조가 본인 스스로에게 가한 압박의 기준은 그대로 사도세자에게도 투영됐던 것이다. 세자는 학문을 배우는 것부터 신하들 앞에서의 말투까지 철저히 왕세자의 무게에 맞춰야 했다. 더 강하고, 더 똑똑하며, 더 빨리 완성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기대를 끊임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 사도세자는 곧 냉소와 질책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세자의 정신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시작이었던 것이다.

미치광이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세자 책봉 이후에도 줄곧 아버지 영조의 강한 통제 아래에 있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흔히 대리청정은 임금이 병환 등으로 직접 정사를 보기 어려울 때 세자가 대신 국정을 운영하는 제도다. 하지만 영조는 큰 병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국정 운영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것은 영조 25년, 영조의 나이 56세 때였다.*4 세자는 겨우 15세였다. 이는 통상적인 대리청정 사례와 달라 조정 신하들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영조가 대리청정을 맡긴 것은 권력을 물려주기 위함이라기보다, '완벽한 후계자 수업'이자 '가혹한 시험대'였던 것.


결국 세자는 명목상 왕의 권한을 위임받는 대리청정을 맡았다. 그러나 실상은 정치적 책임만 오롯이 받으면서도 아버지 영조의 통제는 그대로 유지되는 불완전한 권한이었다. 13년간 지속된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자는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꼭두각시에 가까웠다. 사소한 정사 판단 하나에도 아버지의 분노가 쏟아졌고, 신하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 무력감과 압박감은 점점 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영조를 만나러 가기 전 두려움에 떨며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의대증*5에 시달렸다.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아버지가 무섭다”는 심정을 직접적으로 토로*6했음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표현은 당시 사도세자가 느꼈던 압박감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왕세자로서의 무게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들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도세자의 죽음, 즉 임오화변이라는 비극은 영조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종 독살설과 노론의 추대라는 정치적 굴레 속에서 완벽주의에 갇혔던 영조는 결국 그 완벽주의라는 상자를 아들에게도 씌웠다. 그 끝은 뒤주라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왔다.


  1. *1 조선 역사상 독보적인 최연소 기록임. 2세(만 1세)

    유사 사례로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3세(만 2세)에 책봉하며 정국을 뒤흔든 적이 있으나, 사도세자는 이보다도 1년이 더 빨랐다.
  2. *2 무수리는 엄밀히 말해 '천인'이라기보다는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저급 궁인(공노비)에 해당하나, 당시 사대부 사회와 정치 반대파들은 이를 '천출'이라 비하하며 영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3. *3 1728년(영조 4년) 발생한 반란으로, 반란군 측은 "영조는 숙종의 혈통이 아니다"라는 설과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쾌서를 내걸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정통성 공격은 영조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듯 하다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군주로 키워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4. *4 조선사 역대 대리청정으로 볼 만한 사례는 다섯 번 정도 있었는데, 그중 사도세자는 최연소이자, 최장기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비참한 건 뒤주에 갇힐 때에도 대리청정 신분이란 점이다)

    - 세종 (충녕대군): 태종 말기, 즉위 직전 약 2개월간 수행.
    - 문종: 세종 말기, 약 8년간 수행.
    - 영조 (연잉군): 경종 초기, 왕세제 신분으로 약 2개월 수행. (유일한 왕세제 사례)
    - 사도세자: 영조 중기, 약 13년간 수행. (최연소, 최장기간)

    효명세자: 순조 말기, 약 3년간 수행. (안동 김씨 세도 정치 견제)
  5. *5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기록된 증상으로, 옷을 입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강박증의 일종이다.

    세자는 옷 한 벌을 입기 위해 수십 벌을 가져다 놓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옷을 찢거나 불태우고 수종 드는 궁녀를 살해하는 등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이는 왕실 법도상 옷을 입는 행위가 곧 '아버지 영조를 대면하러 가는 시작'이었기에, 영조에 대한 공포가 옷에 대한 거부감으로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6. *6 《한중록》에는 세자가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하신다"는 심경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대목이 여러 번 등장한다.

    특히 영조가 머무는 경희궁 쪽만 바라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쁘다고 호소했는데, 이는 현대 의학적으로 공황장애나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증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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