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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고려왕계보를 보기 앞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려 왕실의 역사는 참으로 고달프게 느껴진다. 지방 호족들에게 치이고, 문벌 귀족에게 짓눌리더니, 급기야 무신 정권 때는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했던 그 기묘한 세월들까지. 지난 가계도를 통해 그 역경을 함께 살펴봤었다.
지난 시간까지가 고려 내부의 적들에게 시달린 역사였다면,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외부 세력, '몽골'이 고려를 덮친다.
칭기즈 칸 이래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압도적인 힘. 고려는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바야흐로 '원 간섭기'가 시작된 것이다.
과연 이 시기 고려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심양왕'이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가계도를 따라가며 그 실체를 파헤쳐 보자.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중국 황실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여기서 가깝다는 건 단순히 친하다는 게 아니라, 혈연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진짜 가족'이었다는 뜻이다.
고려 제26대 왕 '충선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고려의 국왕이었지만, 동시에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고려 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몽골의 최고 의결 기구인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원 황제의 외손자'라는 독보적인 핏줄 덕분에, 그는 고려 내부의 반대파들을 힘으로 누르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셈이다.
유일한 걸림돌이 있었다면 부인인 '계국대장공주' 정도였다. 충선왕이 '조비'라는 다른 부인만 너무 아끼자, 질투에 눈이 먼 공주가 원나라에 이를 고자질했고, 결국 충선왕은 폐위되고 만다. (이게 그 유명한 '조비 무고 사건'이다.)
하지만 이 폐위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어차피 몸에 원나라 황실의 피가 흐르던 충선왕은 큰 미련 없이 원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마침 원나라 2대 황제 성종이 죽으면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충선왕은 '원 세조 외손자'라는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해 킹메이커로 나선다. 결국 그가 밀었던 무종(카이산)이 황제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보상으로 충선왕은 지금의 요동 일대를 다스리는 '심양왕'이라는 엄청난 직위를 하사받고, 덤으로 고려 국왕 자리까지 되찾게 된다.
정리하자면 충선왕은 고려 국왕 + 심양왕 + 원 세조 외손자라는, 당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슈퍼스타였던 것이다.
재택근무의 원조 충선왕?
하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기대하는 '고려인'으로서의 뜨거운 정체성을 찾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 복위 후에도 그는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원나라 수도에 머물며 이른바 '전지정치(傳旨政治)'를 펼쳤는데, 이게 딱 적절한 예시가 있다.
바로 얼마전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클린스만' 전 감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클린스만 감독 시절, 그는 한국에 머무는 대신 미국이나 유럽에 체류했다. 대표팀 선발 회의처럼 감독이 꼭 필요한 중요한 자리조차 화상 회의로 때우던 그 기이한 풍경, 다들 기억할 것이다.
충선왕이 딱 그랬다. 명색이 고려의 왕인데 몸은 원나라 수도(연경)에 있었다. 고려의 중요한 국정 과제를 결정할 때도, 원나라에 앉아 '교지(편지)'만 보내 신하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황당한 원격근무(?)에 신하들이 제발 귀국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충선왕은 단칼에 거절했다.
고려 사람인가, 원나라 사람인가
충선왕이 고려의 정체성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또 있다. 바로 '심왕(심양왕)' 자리 문제다.
앞서 말한 '심양왕'은 나중에 '심왕'으로 승격되는데, 충선왕은 여기서 묘한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아들인 충숙왕에게는 '고려 국왕' 자리를 주고, 조카인 연안군 왕고에게는 '심왕'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이 결정은 훗날 고려에 엄청난 불씨를 남겼다. 고려 내부는 충숙왕 파와 심왕 왕고 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치고받고 싸우게 된다. 심지어 심왕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나, 고려를 아예 원나라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자는 '입성책동'까지 벌어지며 내분은 극에 달했다.
만약 그가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왕과 심왕 자리를 모두 물려줘 힘을 실어줬다면 어땠을까? 아마 원나라에도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력을 갖춘 고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들을 보면 충선왕에게 '고려'라는 나라가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뭐, 본인 스스로가 고려인이면서 동시에 원나라 사람이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충선왕이 고려를 미워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는 원나라 수도에 '만권당'이라는 도서관 겸 연구소를 짓고, 고려의 젊은 학자들과 원나라의 석학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줬다.
이 만권당이 훗날 고려를 지탱하고 조선의 건국 이념이 되는 '성리학'의 수입 창구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충선왕의 이 '이중적인 정체성'이 결과적으로는 우리 역사에 지대한,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