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8 – 효종 가계도, 현종 가계도로 기해예송, 갑인예송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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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과연 상복 싸움이었을까

조선은 효종의 왕위를 이은 현종 시대, 국익에 전혀 쓸모 없는 예법 논쟁에 15년 넘게 매달렸다. 흔히 상복 문제로 조정이 두 동강 났다고 하지만, 실제 예송을 살펴보면 마냥 상복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싸움의 중심에는 적장자가 아닌 왕이 된 효종이 있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조선 국왕의 정통성은 늘 흔들리고 있었다.


인조의 실책 30년의 그림자와 송시열

효종의 즉위가 이토록 큰 논쟁의 불씨를 남겼을까? 정답은 인조의 석연치 않은 결정에 있다. 소현세자의 부재가 남긴 공백은 인조가 효종을 왕위에 앉히면서 더 깊어졌다. 인조의 이 결정 하나가 조선을 30년 넘게 정통성 논쟁에 시달리게 만든 것이다. 만약 적통인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예송이라는 이름의 정치 소모전은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두고 조정은 격렬하게 맞붙었다.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였기에, 효종을 장자 기준으로 대우할 것인지 아닌지가 정치적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장자'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남인은 1년 복을, 서인은 3년 복을 주장했다. 이는 얼핏 평범해 보이는 예법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서인은 효종을 장자로 대우하며 왕실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 반면 남인은 효종의 정통성을 약화시켜 서인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고,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려는 명확한 전략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적장자 계승 원칙에 어긋난 효종의 즉위를 문제 삼아 현종의 정통성마저 흔들 수 있다면, 북벌론을 주장하며 효종 시절 핵심 요직을 차지했던 서인 정권을 타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첫 예송, 즉 기해예송은 결국 서인의 승리로 끝났고, 송시열은 조정의 실권자로 부상했다.


현종의 반격, 진짜 승자는 누구인가

현종은 첫 예송 논쟁을 단호하게 정리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서인의 기세를 더 키우는 상황을 만들었다. 약 15년 뒤 인선왕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두고 두 번째 예송, 갑인예송이 또다시 벌어졌다.


이때는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한 남인이 명분상 유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조정 내 압도적 힘을 가진 송시열 중심의 서인 산림은 여론을 주도하며 논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이 있다.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현종은 이 두 번째 예송에서 정통성 문제에 분명한 결단을 내린다. 왕에게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대놓고 주장할 정도로 커진 서인의 위세를 현종도 의식하고 있었다. 서인이 여론을 주도했음에도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두 번째 예송 논쟁은 현종이 승하하기 불과 한 달 전에 끝났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은 모두 효종의 즉위, 나아가 인조의 정치적 선택에서 비롯된 정통성 논란에서 시작됐다. 인조가 남긴 정통성의 그림자는 무려 30년 넘게 조선을 짓눌렀고, 정치의 중심을 예법이라는 형식적 틀 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효종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논쟁을 벌인 것은, 인조의 결정이 잘못되었고 소현세자가 적통이었다는 것을 예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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