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7 - 인조, 효종, 현종 가계도로 광해군과 소현세자의 비극 비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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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조선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40년 전, 나라를 구한 세자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지옥 속에서 도망친 아버지를 대신해 조정을 이끌고 민심을 수습한 영웅, 광해군이다. 하지만 그를 가장 집요하게 견제한 이는 왜군이 아니라 친아버지 '선조'였다.


그리고 40년 뒤, 또 다른 세자가 등장한다. 병자호란의 치욕 속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청의 선진 문물을 흡수하고 돌아온 소현세자. 그러나 조선을 개혁할 실마리를 쥐고 있던 이 젊은 세자 역시 친아버지 '인조'의 기괴한 불신 속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하나는 조선을 구했고, 하나는 조선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두 아버지는 위기 속에서 성장한 아들을 끝내 용납하지 못했다. 과연 이 두 명의 군주 중, 국가의 미래에 더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것은 누구였을까?

도망자 선조와 인조의 차이점

선조와 인조는 각각 임진왜란과 호란(정묘·병자)이라는 초유의 국가 재난을 겪으며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두 군주의 도망은 그 성격과 사후 대처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전쟁 발발 직후 의주로 피난한 선조의 행보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최소한 국가 시스템을 복구할 인재를 기용할 줄 알았다. 전란 초기부터 류성룡의 조언을 수용해 의병을 독려했고, 무엇보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파격 발탁해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류성룡이 훗날 『징비록』을 남겨 국가적 반성의 기록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했다. 즉, 몸은 피했지만 국정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반면 인조는 재위 기간 중 이괄의 난(공주), 정묘호란(강화도), 병자호란(남한산성)까지 무려 세 번이나 도망*1쳤다. 가장 큰 문제는 1627년 정묘호란으로 한 차례 뼈아픈 강화조약을 맺었음에도,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채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후금을 배척함)'이라는 비현실적인 명분 외교만 고집했다는 점이다. 국방력 강화도, 실리 외교*2도 없이 전쟁을 자초한 결과는 남한산성 고립과 삼전도의 굴욕(삼배구고두례)이라는 참담한 항복이었다.


광해군과 소현세자의 차이

두 왕의 진정한 밑바닥은 자신들의 아들(세자)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전시 상황에서 세자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대체재'로 떠올랐고, 두 아버지는 이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폭주했다.


선조는 광해군의 높아진 위상을 꺾기 위해 임진왜란 기간 동안 무려 15번이나 "왕위를 넘기겠다"는 양위 파동*3을 벌였다. 이는 신하들의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세자의 기를 꺾기 위한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선조는 찌질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광해군을 후계자로 인정하며 국가 체제의 연속성은 지켜냈다.


인조의 대처는 선조의 찌질함을 넘어선, 권력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이었다. 8년간 청나라의 볼모로 지내며 청 태종의 신임을 얻고 실질적인 외교 창구 역할을 했던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인조는 이를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유목 제국들은 말 안 듣는 속국의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들과 친한 왕족을 새로 앉히는 일이 잦았다.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결국 귀국 후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급사*4하자, 인조는 그 죽음에 대해 제대로 된 진상 조사조차 하지 않고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더 나아가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원손) 3형제마저 제주도로 유배 보내 사실상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로 이어지는 정통 후계의 씨를 스스로 말려버린 것*5이다.


두 군주 모두 조선을 위기에 빠뜨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조는 우왕좌왕했고, 인조는 아집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인조에게 훨씬 더 무거운 비판을 가한다. 지금도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호로자식(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끔찍한 욕설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과 그 자식들을 사회가 품지 못하고 멸시하며 생겨난 상처의 흔적이다.


선조의 무능은 끔찍했지만, 적어도 유능한 신하와 세자를 통해 나라를 재건할 불씨는 남겼다. 그러나 인조의 맹목적인 고집과 권력욕은 국제 정세를 읽어낸 유능한 세자의 혈통을 제 손으로 끊어버렸고, 조선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실낱같은 기회마저 완벽하게 짓밟아버렸다. 지도자의 무능과 빗나간 질투가 국가와 백성의 삶에 얼마나 깊은 흉터를 남기는지, 인조는 그 최악의 표본으로 역사의 기록에 남게되었다.


  1. *1 심지어 인조의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것은, 강화도로 가려다 실패해서 간 것이었다. (선조와 달리 도망조차도 잘 못친 것...)
  2. *2 따지고 보면, 선조는 명나라에게 절대적 의존을 하는 완벽한 실리외교를 취했다. 또 급히 도망가는 와중에도 아들 광해군을 통해 분조를 운영한 것을 보면 정치적 감각(?)은 살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3. *3 이전 가계도에서 다루는 내용이니 참고하면 좋다.
  4. *4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어의였던 이형익이 침을 놓은 직후 사망했음에도, 인조는 처벌하기는커녕 감싸고돌았다. 실록을 편찬한 사관조차 독살의 의혹을 강하게 제기할 만큼, 인조의 비정상적인 대처는 지금까지도 가장 유력한 독살의 정황 증거로 꼽힌다.
  5. *5 이런 정황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운다. 소현세자가 정말 독살이 아니라 병으로 급사한 것이였더라도,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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