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6 - 선조와 광해군 가계도, 아들의 멘탈을 부순 15번의 '양위 파동'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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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조선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조선 역사상 전대미문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무너져가는 조선을 사실상 '하드캐리'하며 나라를 구한 영웅은 국왕이 아니라 세자 광해군이었다.


하지만 전란의 불길 속에서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의 목숨을 가장 집요하게 노린 최종 보스는 바다 건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친아버지, 선조였다.


대체 왜 선조는 나라를 지켜낸 아들을 그토록 병적으로 견제하고 미워했을까? 왕과 세자 사이에 벌어진 숨 막히는 권력 투쟁과, 한 군주의 찌질한(?) 질투심이 빚어낸 비극을 파헤쳐 본다.

국왕의 '런'과 세자의 '하드캐리'

전쟁이 터지자마자 선조가 선택한 전략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 끝 의주까지 도망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시궁창에 처박았다. 반면, 이 위기 속에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조정을 둘로 쪼개는 '분조(分朝)'*1를 단행한다. 자신은 도망갈 테니, 아들에게 조선 땅에 남아 임시정부를 이끌며 적의 화살받이가 되라고 등을 떠민 셈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예상을 깨고 전방위적인 맹활약을 펼쳤다. 전쟁터를 직접 누비며 의병을 규합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명나라 원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등 실질적인 전시 지도자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나라를 버린 건 임금이고, 나라를 지킨 건 세자"라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명분과 민심을 모두 잃은 선조에게,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아들의 존재는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위기의식과 콤플렉스로 다가온 것이다.

광해군의 멘탈을 박살낸 15번의 '양위 쇼'

위협을 느낀 선조는 아들의 기를 꺾기 위해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괴한 정치적 카드를 꺼내 든다. 바로 "나 왕 안 해! 세자에게 왕위 물려줄 거야!"라고 선언하는 '양위(讓位) 파동'이다. 선조는 무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이 짓을 15번이나 반복했다. 전쟁 발발 첫해인 1592년에만 무려 5번이었다.


물론 선조는 진짜로 왕위를 넘겨줄 생각이 1도 없었다. 이는 신하들과 세자를 길들이기 위한 악질적인 정치 쇼이자 고도의 가스라이팅이었다.


왕이 양위를 선언하면, 신하들과 세자는 밥도 굶어 가며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치며 싹싹 빌어야 했다. 만약 "그럼 물러나시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앙위에 동의하는 순간 곧바로 역적으로 몰려 모가지가 날아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 반복적인 '양위 쇼'를 통해 광해군의 세력을 짓밟고, 신하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며 자신의 흠집 난 왕권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선조의 광해군 흔들기는 멈추지 않았다. 훗날 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적장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차별은 극에 달했다.


왕이 대놓고 세자를 홀대하자, 궁궐 내의 역학관계도 노골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대비전(인목왕후)의 일개 궁녀들이 세자궁(광해군)의 궁녀들을 대놓고 무시하고 하대하는 하극상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는 당시 광해군의 정치적 위상이 궁궐 내에서조차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결정타는 선조의 임종 직전에 터졌다. 병세가 악화된 선조가 마침내 광해군을 후계자로 확정하고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최종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소북파의 핵심 대신 '류영경'은 이 교지를 조정에 발표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숨겨버리는 초유의 범죄를 저지른다. 국왕이 기적적으로 깨어나 마음을 영창대군 쪽으로 바꾸기를 기다리며 언론 통제를 시도*2한 것이다.


결국 선조는 국가의 위기를 수습해야 할 에너지를, 오직 자신의 권력욕과 아들에 대한 찌질한 열등감 폭발을 해소하는 데 사적으로 낭비했다. 광해군이 훗날 왕위에 오른 뒤 왜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일으키며 정적들을 숙청하고 의심증에 시달렸는지, 선조가 만들어놓은 이 지옥 같은 세자 시절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는다.


  1. *1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의 분조는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두 개로 쪼갠 초유의 비상사태였다. 선조는 명나라 국경지대인 의주에 머물며 언제든 도망칠 준비(요동 파천)를 했고, 광해군은 사지(死地)인 조선 한복판을 누비며 정부 시스템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분조는 붕괴 직전의 조선을 버텨내게 한 최고의 신의 한 수였지만, 동시에 선조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독약이 되었다.
  2. *2 국왕의 유언장을 신하가 사가에 숨긴다는 것은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엄청난 역모 행위였다. 그럼에도 류영경이 이런 미친 짓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소 선조가 광해군을 얼마나 혐오하고 갓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즉, 아주 기적적으로 왕이 잠깐이라도 회복해 유언을 다시 남길 수 있다면 "왕은 결국 영창대군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에 자신의 목숨과 가문을 건 극단적인 정치적 베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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