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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는 그동안 삼국통일 과정에서 태종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김법민, 김유신 등 주요 인물들만 주목한 교육을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들 소수의 인물 능력만으로 달성된 것이 절대 아니다. 김인문과 같은 숨겨진 공신들의 활약이 뒷받침되었다.
김인문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1로, 당나라에 오랜 기간 머물며 신라-당 연합의 외교적, 군사적 핵심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김인문은 삼국통일의 가장 중요하고 궂은 역할을 묵묵히 처리하며 통일 전선의 효율을 극대화했다.
2. 배경
흔히 신라의 삼국통일 주역으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을 꼽는 통념이 존재한다. 마치 야구에서 4번 타자가 팀의 중심 선수로 주목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야구 강팀에는 4번 타자의 활약을 극대화하는 5번 타자가 존재한다. 5번 타자는 4번 타자와의 승부를 회피하려는 상대팀의 전략을 봉쇄하며 팀 타선의 응집력을 높인다. 한화 이글스가 강팀으로 불리던 2000년대 후반, 이범호 선수가 5번 타자로 활약하며 4번 타자 김태균의 부담을 줄였다. 이범호 선수는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 5번을 맡은 것이 아니라, 팀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숨은 기여자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도 김인문이 이러한 5번 타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김인문은 통일의 주요한 국면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외교와 군사의 실무를 조율하며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다졌다.
3. 전개
3.1.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자식 농사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진골이라는 본인의 신분적 한계를 김유신과의 결합으로 극복하며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김춘추는 정치적, 외교적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당 동맹을 성사시키는 등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춘추는 뛰어난 능력 외에도 자식 교육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맏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삼국통일을 완수하며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둘째 아들 김인문 역시 문무왕에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으나, 통일의 이면에 가려져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3.2. 대당 외교의 최전선, 숙위 생활
김인문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외교적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김인문은 일생의 상당 부분을 당나라에서 보내며 당 황제 주변에서 숙위(宿衛) 역할을 수행했다.*2 숙위는 단순한 인질 생활이 아니라, 당나라의 정치와 군사 상황을 파악하고 신라의 입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외교 창구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당나라의 군사력이 필수 요소였음을 고려하면, 당나라에 상주하며 외교 역량을 발휘한 김인문의 역할은 신라에게 핵심적이었다. 김인문은 당 고종의 신임을 얻으며,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3.3. 백제 정벌과 부흥 운동 진압에서의 역할
김인문은 백제 정벌에도 참여했다. 김유신이 신라군의 총사령관으로 황산벌 전투 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널리 알려졌다. 반면 김인문은 당나라 군대의 부사령관으로 백제 정벌에 참여했다.*3 이는 김인문이 신라와 당나라 양측의 군사 작전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핵심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신라-당 연합군의 원활한 협력은 백제 멸망에 필수적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김인문은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데도 큰 활약을 했다. 김인문의 군사적, 외교적 조율 능력은 연합군의 작전 효율성을 높였다.
3.4. 고구려 멸망전에서의 신라군 총사령관
백제 멸망 이후, 김인문은 고구려 멸망전에도 참여했다.*4 고구려 멸망전에서 김인문은 신라군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지휘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전투에서 당나라의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인 군사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김인문의 총사령관 임명은 김인문이 군사적 역량과 함께 신라군을 통솔하는 지도력까지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김인문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궂은 외교 및 군사 실무를 묵묵히 도맡아 처리했다.
4. 결과 및 평가
신라의 삼국통일은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등 주요 인물들의 활약뿐만 아니라, 김인문과 같은 숨은 공로자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인문은 당나라에 머물며 신라와 당나라의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5 이는 당나라의 막대한 군사력을 신라의 통일 전쟁에 활용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김인문은 백제 정벌 및 부흥 운동 진압, 고구려 멸망전 등 주요 전역에서 외교관이자 군 지휘관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경주에 위치한 태종 무열왕릉 옆에는 김인문의 묘가 나란히 존재*6한다. 이는 김인문이 신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명인 무열왕과 동등하게 여겨질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김인문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신라의 이익을 대변하고, 당나라와의 연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1 어머니가 바로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문희)다. 즉, 아버지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이고, 외삼촌은 최고 사령관 김유신인 셈이다. 형인 문무왕이 없다면 바로 왕위 계승 1순위인 그야말로 당대 신라 최고 권력 가문의 핵심 '금수저' 진골이었다.
- *2 기록에 따르면 김인문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뱃길을 무려 7번이나 건너 당나라를 오갔고, 생의 절반에 가까운 22년을 당의 수도 장안에서 보냈다. 특유의 친화력과 눈치로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신라 최고의 엘리트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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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시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 총사령관 소정방 옆에서 껄끄러운 양국 간의 입장을 조율하던 인물이 바로 김인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신라군 소속이 아니라 '당나라 군대의 부사령관' 자격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나라 황실 자체가 선비족 계열의 피가 섞여 있었고, 제국 특유의 개방성 덕분에 외국인을 고위 공직이나 장군으로 기용하는 일이 꽤 흔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동맹국의 왕족을 자국 원정군의 '넘버 투(2인자)' 자리에 앉혔다는 것은, 당 수뇌부가 김인문을 얼마나 전폭적으로 신뢰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인문은 이 탄탄한 신임을 무기 삼아, 겉으론 연합군이면서 속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 딴주머니를 차던 당나라 군부를 현장에서 끈질기게 견제하는 궂은일을 묵묵히 해냈다. - *4 이 시기 김유신의 나이가 이미 70대를 넘긴 고령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김유신을 대신하여 대규모 야전군을 직접 통솔한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이었다. 말 잘하는 외교관인 줄만 알았더니 군사적 지휘 능력까지 갖춘 완벽한 '올라운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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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훗날 신라와 당나라가 맞붙은 나당전쟁이 터지자, 분노한 당 고종은 눈엣가시 같던 문무왕을 일방적으로 폐위하고 당에 있던 김인문을 새로운 '신라왕'으로 임명해 돌려보내려 했다.
조국과 친형 문무왕을 배신하면 당장 왕이 될 수도 있는 얄궂은 운명이었지만, 김인문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끝까지 신라의 든든한 방패로 남았다. - *6 사실 김인문은 끝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694년 당나라 장안에서 병사했다. 당나라 황실(측천무후)은 크게 슬퍼하며 막대한 호위를 붙여 그의 시신을 신라로 반환해 주었고, 신라 조정은 그에게 김유신과 동급인 최고 벼슬 '태대각간'을 추증하며 왕의 무덤인 무열왕릉 바로 길 건너편에 묻히는 파격적인 대우로 헌신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