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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성여왕의 즉위는 신라 왕실의 불안정한 왕위 계승과 정통성 약화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진성여왕은 초기 민심 수습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나, 중앙정부의 기강 해이와 부패로 인해 지방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은 신라 중앙정부가 수도 인근 지역의 반란조차 진압하지 못하는 실상을 드러냈으며, 이는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과 후삼국 시대 도래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2. 배경
신라는 진성여왕 즉위 이전부터 중앙 정치의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경문왕 시대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가 당시 신라의 사회적 동요와 통제력 상실을 암시했다. 두건 장인이 대나무 숲에 진실을 외치고, 신라 정부가 소문을 막아내지 못하는 상황은 신라의 미래를 예고했다.
신라 왕실은 불안정한 왕위 계승으로 인해 정통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경문왕은 사위로서 왕위에 올랐고, 부자 계승을 통한 안정적인 왕권 유지에 실패했다.
3. 전개
3.1. 왕실의 정통성 위기와 진성여왕의 즉위
신라는 654년 진덕여왕 이후 약 230여 년 만에 진성여왕이 세 번째 여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신라 왕실이 더 이상 남성 직계 계승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경문왕을 이어서 경문왕의 세 자녀가 49대부터 51대까지 연이어 왕위에 올랐다.이후 52대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였다.*1 이처럼 형제상속, 여왕 즉위, 서자 등극은 신라 왕실의 씨가 마른 상태였음을 나타낸다. 정통성이 부족한 경문왕의 뒤를 이은 진성여왕은 약화된 왕의 권위 속에서 즉위했다.
3.2. 초기 정책과 중앙정부의 실책
진성여왕은 즉위 초 국가의 안정과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진성여왕은 크게 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주군(州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흔히 진성여왕대의 조세 면제를 신라 국력의 심각한 약화로 이해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1년간 세금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정적 여력이 신라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위기는 세금 부족이 아닌 중앙정부의 해이한 기강에서 비롯되었다.당시 신라는 완벽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니었다. 5소경과 같은 거점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은 유력자들을 촌주로 삼아 운영했다. 신라 정부는 이들 유력자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이들을 통해 세금을 거두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이끄는 신라 정부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진성여왕은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운 남자 두세 명을 몰래 궁으로 불러들여 비정상적인 관계를 가졌다.*2 진성여왕은 이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주고 국정을 위임했다. 그 결과 아첨하여 총애를 받는 무리가 제멋대로 행동했으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상과 벌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아 국가 기강이 완전히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3.3. 지방 통제력 상실과 도적의 봉기
왕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도 어려운 시기에, 중앙정부의 기강은 무너졌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지방 세력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공물과 부세를 중앙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고는 텅 비고 나라 재정이 궁핍해졌다. 진성여왕은 사신을 보내 조세를 독촉했다.그러나 독촉의 대상은 지방 유력자인 촌주가 아니라 백성이었다. 백성들은 이미 지방의 촌주들에게 세금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앙정부가 보낸 사신에게도 추가로 세금을 강요당하는 이중 수탈 상황에 놓였다. 기강이 무너져 통제력을 상실한 중앙정부는 지방 유력자인 촌주들을 압박할 수단이 없었다. 중앙정부는 만만한 백성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전국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3.4. 원종·애노의 난 발생과 진압 실패
반기를 든 여러 농민 세력 중 원종과 애노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원종과 애노는 사벌주(상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3 이 반란 자체보다 신라 정부의 진압 실패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흔히 원종·애노의 난을 단순히 큰 규모의 민란으로만 인식하기도 하나, 실상은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수도와 인접한 상주 지역의 반란조차 진압하지 못했다는 점은, 중앙정부가 가까운 지역의 도적도 제압하지 못하는 실정에 처했음을 증명한다. 경상도와 같이 수도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지역의 반란도 제압하지 못하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지방 유력자들은 중앙정부에 의존한 보호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4. 결과 및 평가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지방 곳곳에서 유력자들은 자체적인 무장 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을 쌓고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며 '성주(城主)'를 자칭했다. 또한 사병을 길러 지역을 방어하며 '장군(將軍)'을 자처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후삼국 시대의 주역인 호족이다.*4 원종·애노의 난 진압 실패는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 붕괴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는 호족의 성장을 촉발했으며, 결과적으로 후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1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신원미상의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오죽 대를 이을 진골 남성이 씨가 말랐으면 이렇게 밖에서 낳아온 서자를 찾아내 왕위에 올렸을지, 당시 신라 왕실의 처절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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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성여왕의 대표적인 스캔들이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여왕의 음행'이 아니라 약해진 왕권을 방어하기 위해 측근 세력을 기용하려던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왕의 숙부이자 내연남이었던 '위홍'이 대표적인데, 그는 여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향가집인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는 등 핵심 실세로 활약했다. -
*3
상주가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신라 정부가 가장 중요한 영남최대의 곡창지대와 한강유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목을 동시에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지리적 위치다. 상주는 험준한 변방이 아닌 수도 서라벌과 지척인 '경상도' 권역, 즉 신라 정부 통치 체제의 앞마당이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앞마당 방어선조차 막아내지 못한 것은 신라 중앙군의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선택의 순간들을 저울질하던 지방 호족들에게 궐기의 결정적 신호탄이 되었다. - *4 바로 이 진성여왕 시기의 극심한 혼란을 틈타 지방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고, 훗날 스스로 왕을 칭하며 나라를 세우게 되는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태봉)의 '궁예'다. 바야흐로 피 튀기는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