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5 - 명종과 하성군(선조) 가계도, 방계이자 막내는 어떻게 형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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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조선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조선 건국 이래 170여 년간 지켜져 온 굳건한 룰이 깨졌다. 왕의 적장자도, 심지어 정비의 소생도 아닌 후궁의 핏줄(방계)이 처음으로 용상에 오른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하성군)다.


적통도 아니었고 심지어 덕흥군의 세 아들 중 막내였던 그가 어떻게 형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철저한 족보의 묘수와 당시 조정 대신들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진 기획 승계에 가깝다.


명종은 왜 하필 '막내'를 선택했나?

비극의 시작은 명종의 유일한 적자였던 순회세자의 요절(13세)이었다. 후사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명종은 조카들, 특히 이복동생 덕흥군의 세 아들을 궁으로 자주 불러들이며 은밀한 관찰을 시작했다.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일화가 단연 압권이다. 명종이 자신의 익선관(왕이 쓰는 모자)을 벗어 조카들에게 써보게 하는 테스트를 치렀는데, 다른 형들은 한 번씩 써보았지만 어린 하성군만은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임금의 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극구 사양했다는 것이다.*1


이 일화로 하성군은 단숨에 왕재(王才)로서 눈도장을 찍게 된다. 이후 명종이 병상에 누웠을 때 인순왕후가 하성군에게 직접 병간호를 맡긴 것을 보면, 사실상 이때부터 유력한 1순위 후보로 내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분과 현실을 충족한 완벽한 후계자

하지만 총명함만으로 왕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종의 손자 세대 중 유력한 후보덕양군(중종 6남)의 아들인 '풍산군'덕흥군(중종 7남)의 세 아들 정도였다. 친부의 서열만 따지면 6남의 아들인 풍산군이 유리해 보이지만, 덕흥군의 아들들에게는 서열을 단숨에 뒤집는 결정적 명분이 있었다. 바로 양자 입적이다.


둘째 하릉군 중종의 3남 '금원군'의 양자로 입적.
셋째 하성군(선조) 중종의 1남 '복성군'의 양자로 입적.

복성군은 비록 후궁(경빈 박씨)의 소생이었지만 중종의 엄연한 장남이었다. 인종과 명종 등 정실 핏줄이 모두 끊어진 상황에서, 왕실 족보 시스템상 최우선 순위는 다시 장남인 복성군의 계보로 돌아가게 된다.


즉, 하성군은 덕흥군의 3남 자격이 아니라 '중종의 장남 복성군의 대를 잇는 종손' 자격으로 계승 서열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2 이는 족보상의 명분이 승계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계승 명분을 완벽히 갖췄다 해도 다른 경쟁자들 역시 건재했다. 그런데도 조정 대신들과 인순왕후가 굳이 막내인 하성군을 지목한 배경에는 노골적인 정치적 득실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당시 후보군들의 현실적인 제약을 비교해 보면 상황이 명확해진다.


풍산군 (당시 41세 / 기혼): 나이가 너무 많다. 산전수전 다 겪은 41세 성인을 왕으로 앉히면 신하들 입장에서 통제하거나 국정을 주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하원군 (당시 22세 / 기혼): 성인인 데다 이미 혼인을 하여 처가(외척)가 굳건히 형성된 상태였다. 윤원형 일가라는 거대 외척 세력의 전횡에 시달렸던 조정 대신들에게, 새로운 외척 리스크가 있는 기혼자는 최우선 기피 대상이었다.

하성군 (당시 15세 / 미혼): 혼인 전이라 외척 리스크가 없고, 나이도 어려 정치적으로 백지상태와 같았다.


15세라는 하성군의 나이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대리청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기에 가장 완벽한 조건이었다. 또한,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한 대신들 입장에서도 어린 왕을 입맛에 맞게 교육하며 신권(臣權) 주도의 정국을 이끌어가기 좋은 타깃이었다.*3


결국 선조의 즉위는 흠잡을 데 없는 '장남의 양자라는 족보', 외척의 간섭을 피하려던 '신하들의 견제', 그리고 권력을 쥐려던 대비의 '수렴청정 계획'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린 결과물이다.


  1. *1 하성군이 익선관을 거절하며 "신하가 어찌 감히"를 시전한 일화는 겉보기엔 성리학적 미담의 결정체다. 하지만 피바람 부는 조선 궁궐의 생리를 고려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눈치 없이 왕의 모자를 덥석 썼다가는 역모의 싹으로 찍혀 죽기 십상이라는 것을, 친부인 덕흥군 측에서 철저하게 주입한 '생존형 처세술'이자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될성부른 왕재를 만들기 위한 어른들의 완벽한 빌드업이었던 셈.
  2. *2 하성군을 단숨에 서열 1위로 떡상시켜 준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장남 복성군의 양자'라는 호적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입양 관계는 그가 선조로 즉위하자마자 칼같이 파양 조치된다. 선대왕의 대를 잇기 위해 '명종의 양자'로 새롭게 호적을 세탁(?)해야 했기 때문.
    결국 복성군의 족보는 왕좌에 앉기 위해 철저하게 이용된 '합법적 치트키'에 불과했다. 즉위 후 선조는 자신을 대신해 복성군의 제사를 지낼 다른 양자를 들여보내는 것으로 나름의 정산을 마쳤다.
  3. *3 명종이 승하하던 당일, 왕이 말문이 막혀 유언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영의정 이준경은 인순왕후를 강하게 압박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언문 전교(한글 교서)를 다급하게 받아낸다.
    이는 명종의 처가 세력(외척)이나 다른 종친들이 딴마음을 먹기 전에 아예 대못을 박아버린 완벽한 '선빵(?)'이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신권(臣權)이 왕위 계승이라는 판을 어떻게 설계하고 멱살 쥐고 끌고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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