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마지막 백제 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무왕이 압도적인 토목 기술과 치밀한 정치력으로 겨우 살려놓은 백제의 불씨. 하지만 그 화려했던 부활의 불꽃은 아들 의자왕 대에 이르러 너무나도 허무하게 꺼지고 만다.
백제는 어떻게 그토록 순식간에 지도에서 지워졌을까? 그리고 나라가 망하고 왕이 항복했음에도, 왜 백제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부흥 운동'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저항을 이어갔을까.
오늘은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의자왕과, 쓰러진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던 부여풍, 부여융의 엇갈린 행보를 통해 멸망의 진짜 이유를 파헤쳐 본다.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
의자왕이 즉위하던 무렵, 백제의 정국은 이른바 '대성팔족(8개의 유력 귀족 가문)'이 꽉 잡고 있었다.*1 그중에서도 끝판왕은 단연 '사택씨' 가문이었다.
앞선 글에서 다뤘듯, 미륵사 석탑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사택왕후)가 엄청난 재물을 바쳐 사찰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대한 왕실 사찰을 거뜬히 지어 올릴 만큼 귀족 가문의 경제력과 정치력이 국왕을 뺨칠 정도로 막강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의자왕 본인에게 사택씨는 어머니의 가문(외가)이었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의자왕에게 이 견고한 귀족 카르텔은 반드시 부숴야 할 장애물이었다.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 '나라가 몹시 어지럽다'고 보고할 정도로 정국은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사택지적과 국왕의 어머니가 연달아 세상을 떠나자, 의자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눈엣가시 같던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버린다.*2 학계에서는 이를 의자왕이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벌인 '친위 쿠데타'로 해석*3한다.
백제 멸망과 계백의 '5천 결사대' 미스터리
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 덕분에 의자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 '완벽한 권력'은 훗날 백제의 목을 조르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숨통을 끊기 위해 밀고 내려왔다.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백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킬 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왜 나라가 망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군사는 고작 '5천 명의 결사대'뿐이었을까?*4
답은 의자왕이 저지른 '숙청'에 있다. 왕에게 억눌리고 쫓겨났던 귀족들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도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우리를 버린 왕을 위해 내 사병을 희생할 수는 없다"며 팔짱을 끼고 방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의자왕이 완성했던 그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는, 정작 나라를 지켜야 할 순간에 왕을 철저한 고립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과 백강 전투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무릎을 꿇으며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이른바 '백제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다시 뭉치게 했을까? 사실 백제 귀족들에게 '수도 함락'이나 '국왕의 굴욕'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과거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무릎을 꿇었고, 개로왕은 아차산에서 참수당했으며,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럼에도 백제는 늘 부활했다. 의자왕이 항복했더라도 지방에 흩어진 귀족들의 군사력과 통치력은 아직 건재했기에,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왕자 부여풍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거세게 저항했다. 이때 일본(왜국) 역시 부흥군을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파병한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외국에서 국가적 사활을 걸고 원군을 보냈다는 건, 당시 동아시아 외교 무대에서 백제부흥군이 여전히 '정통성 있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 눈물겨운 저항도 결국 내부의 분열을 넘지 못했다. 지도부 간의 권력 다툼으로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금강 하구에서 벌어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며 부흥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린다.
700년을 이어온 위대한 고대 국가 백제는, 그렇게 씁쓸한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
*1
아버지 무왕 시절엔 왕권이 압도적이었는데, 의자왕 즉위기엔 대성팔족이 정국을 꽉 잡고 있었다는 내용이 언뜻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무왕이 귀족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았던 것이 아니라, 사택씨 같은 거대 가문을 파트너로 포섭해 시스템을 안정시켰던 것에 가깝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보면,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가 막대한 정재(淨財, 깨끗한 재물)를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즉, 무왕의 거대 프로젝트들은 사택씨 같은 유력 귀족의 강력한 자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
*2
"지난해 11월 대좌평 사택지적이 죽었습니다. (...)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왕의 동생 교기와 유력 인사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백제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
- 『일본서기』 고교쿠 천황 원년 조 - -
*3
의자왕은 즉위 초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로 '해동증자'라 불렸다. 여러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를 순수한 인성보다는 친위 쿠데타를 위한 빌드업으로 봐야 할 듯하다.
유교적 덕목을 내세워 대외적인 명분을 쌓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왕실을 결속시켜 귀족들을 고립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코스프레'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실제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숙청 규모를 보면, 때가 왔을 때 외가인 사택씨마저 가차 없이 쳐낼 정도로 냉혹한 정치적 면모를 보여준다. -
*4
당시 백제의 전체 군사력을 감안할 때 5천 명은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이는 단순히 병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 의자왕의 독주에 질린 귀족들이 '전쟁 사보타주(태업)'를 벌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귀족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병(私兵)을 내놓지 않으면서, 결국 왕실 직속 부대인 계백의 결사대만 외롭게 사지로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