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계보5 -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가계도로 보는 김춘추, 김유신의 등장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신라)
[ 펼치기 ]
🧭 네비게이션 로딩 중...

1. 개요

신라의 삼국 통일 주역인 김춘추와 김유신은 당대 신라 정계에서 비주류 혈통에 속했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정치적 약점을 지녔고,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으로서 신라 진골 귀족 사회의 견제를 받았다.


이들은 선덕여왕의 근왕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여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신라의 핵심 권력층으로 성장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후 진덕여왕 대에 권력을 공고히 했고, 신라 삼국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


2. 배경

신라는 고유한 신분 제도인 골품제를 운영했다. 골품제는 왕족과 귀족의 혈통에 따라 관직 진출과 일상생활 전반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최상위 신분인 성골은 왕위 계승이 가능한 유일한 혈통이었으나, 7세기 초 성골 남계가 단절되며 왕위 계승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진골은 성골 다음가는 신분으로, 신라의 주요 귀족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을 받으며 대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신라의 서부 변경을 위협했고,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면서도 신라를 경계했다. 신라 내부적으로는 진골 귀족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왕권과 귀족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이 요구되었다.

3. 전개

3.1. 김춘추의 혈통적 제약


김춘추는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손자다. 진지왕은 579년 귀족 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1 진지왕의 폐위는 김춘추 가문이 주류 정치 세력에서 멀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며,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 또한 폐위된 왕의 혈통이라는 꼬리표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김춘추는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학설에서는 김춘추가 본래 성골 혈통이었으나, 진지왕의 폐위와 연관되어 김춘추 가문이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한다. 이는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폐위된 왕의 가문이 겪을 수 있는 정치적 불이익을 보여준다. 김춘추는 이러한 혈통적 약점 때문에 기존의 막강한 진골 귀족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3.2. 김유신의 가야계 혈통과 한계


김유신은 가야 왕족 출신으로서 신라에 편입된 혈통이다.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며 신라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2 김유신 가문은 가야 왕실의 배경 덕분에 신라 진골이라는 상위 신분을 획득했다. 그러나 가야계 혈통이라는 점은 신라의 박, 석, 김 씨 위주로 구성된 기존 진골 귀족 사회에서 이질적인 요소였다.


기존 신라 진골 귀족들은 김유신 가문을 새로운 외부 세력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견제했다. 김유신은 군공을 통해 신라 내에서 입지를 다져나갔으나, 혈통적 배경으로 인한 정치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모두 최상위 신분인 진골에 속했으나, 각각 폐위된 왕의 후손과 가야계라는 태생적 약점을 공유했다. 이러한 공통의 배경은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동기가 되었다.


3.3. 선덕여왕의 등장과 김춘추·김유신의 부상


7세기 초 신라는 성골 남계가 단절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이 632년 즉위했다. 선덕여왕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위상이 낮았다. 특히 당나라 등 주변국들은 여성 군주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고 기존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혈통적 제약을 가진 김춘추와 김유신을 자신의 근왕 세력으로 등용했다. 이 시기에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인을 통해 가문 간의 결속을 강화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김문희(문명왕후)와 결혼하여 강력한 연대를 구축했다. 이들의 결합은 각자의 혈통적 약점을 보완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3.4. 비담의 난 진압과 권력 장악


선덕여왕 재위 말기, 신라 내부의 구 귀족 세력은 선덕여왕의 정치적 위상 약화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상대등 비담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647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선덕여왕 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근왕 세력으로서 비담의 난 진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김유신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3 비담의 난 진압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라 정계의 주류 세력으로 완전히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비담을 포함한 반란 주도 세력을 제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3.5. 진덕여왕 대의 권력 공고화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 진압 직후 사망하자, 진덕여왕이 647년 왕위에 올랐다. 진덕여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군주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즉위했으며, 진덕여왕 정권은 사실상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시기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협력하에 정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김춘추는 직접 당나라에 건너가 당 태종과의 외교 협상을 벌이며 신라와 당나라 간의 나당동맹 체결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4 김춘추는 대당 외교에서 신라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김유신은 군사적으로 신라를 안정시키고 백제에 대한 공세를 준비했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위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기반을 확립했다.

4. 결과 및 평가

김춘추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했다. 김유신은 신라의 대장군으로서 통일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들의 활약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김춘추는 나당동맹을 주도하여 외교적 기반을 다졌고, 김유신은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당대 신라 사회에서 비주류 혈통이라는 약점을 딛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들은 폐위된 왕의 후손과 가야계 왕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신라 정계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삼국 통일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실제 배경은 통념과 달리 철저한 비주류였다.*5


이들이 보여준 비주류에서 주류로의 성장은 신라 골품제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 *1 《삼국사기》는 진지왕이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 폐위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한 표면적 명분으로 해석하며, 실질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진지왕과 이를 견제하려는 보수적인 진골 귀족 연합(화백회의) 간의 권력 투쟁 결과로 본다. 결과적으로 구 귀족 세력에게 축출된 가문의 후손인 김춘추가 훗날 그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셈.
  2. *2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에 항복한 대가로 진골 신분을 부여받았으나, 기존 주류 귀족 사회에서는 '망국의 왕족'이자 신흥 세력으로서 철저히 견제받았다.

    김유신이 변방의 전장을 누비며 끊임없이 군공을 세워야 했던 배경에는,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여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해야만 했던 가야계 진골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3. *3 비담의 난 당시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지자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는데, 김유신이 불붙인 연을 띄워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아군의 동요를 막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김유신이 무력 뿐 아니라 치밀한 심리전과 부대 통솔에 능한 지휘관이었음을 보여준다.
  4. *4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나라까지 직접 넘어가 외교 교섭을 주도했다. 특히 당 태종과의 회담에서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그의 탁월한 국제 정세 판단과 외교력 덕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 태종 역시 김춘추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국빈에 준하는 특급 예우를 갖추었다.
  5. *5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는 혈통을 통해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장치였으나, 국가적 존망의 위기 앞에서는 그 한계를 드러냈다.

    정작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주도한 인물들이 제도권 내에서 차별받던 '폐위된 왕의 후손'과 '편입된 가야계'였다는 점은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