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계보5 - 성왕과 무왕 가계도, 사비 시대의 개막과 관산성 전투 알아보기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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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백제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백제의 수도'라고 하면 한국인 열에 아홉은 공주(웅진)를 먼저 떠올린다. 무령왕릉의 임팩트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통치 기간을 데이터로 따져보면 웅진 시대는 고작 63년으로, 과도기에 불과했다.


반면 부여(사비) 시대는 122년 동안 지속되며 백제 후기의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무령왕이 겨우 살려놓은 불씨를 통해 백제 제 2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성왕의 야심, 그리고 서동요 설화로 유명했던 당대 최고의 셀럽 '서동' 무왕.


오늘 이야기는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승부사의 엇갈린 운명과, 그들이 선택한 치열했던 생존 전략을 따라가 본다.


사비시대, 남부여 개창 '백제 제 2의 전성기'

성왕은 즉위 직후 국가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대수술을 단행했다. 그 시작이 바로 사비 천도였다. 웅진이 방어에는 유리한 산성 도시였지만 좁은 지형 탓에 확장이 불가능했다면, 사비는 넓은 평야와 금강을 낀 도약의 땅이었다.


주목할 점은 사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당시 사비는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과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건설되었다. 즉, 처음부터 철저한 도시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고대의 계획 신도시였던 셈이다.


여기에 국호까지 '남부여'로 바꾸며 "우리가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선포했다. 이는 위축된 백제의 기세를 단숨에 끌어올린 고도의 브랜드 리뉴얼 전략이자, 한반도 내의 유일한 부여 계승자를 추구해, 고구려를 뛰어 넘는 백제 중심의 천하관을 수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관산성의 비극은 백제 내부 분열 때문?

성왕의 평생 숙원은 잃어버린 백제의 뿌리, 한강 유역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는 신라 진흥왕과 손잡고 고구려를 밀어붙인 끝에 76년 만에 한강 하류를 수복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믿었던 신라가 뒤통수를 치며 한강 유역을 독차지해 버린 것이다.


분노한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하지만 관산성으로 이동하던 중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참수당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서에 기록된 '호위병 50명'*1이라는 숫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왕이 고작 50명만 대동했다는 건, 대규모 행렬을 피하고 극비리에 빠르게 이동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밀한 동선이 적에게 실시간으로 털렸다? 이건 단순한 보안 실패로 보기 어렵다.


당시 백제 귀족들은 강력한 왕권 드라이브를 펼치던 성왕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성왕의 죽음은 신라의 뛰어난 첩보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쟁을 반대했던 백제 내부 고위층이 정보를 유출했거나 왕의 위기를 방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백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2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 혜왕, 법왕 시대에는 왕이 숨을 죽이고, 대신 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귀족 연합 정치가 뿌리내리게 된다.


백제의 완벽한 전성기?

이렇게 귀족들이 왕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세상. 이 견고한 카르텔을 깨부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웃사이더, 무왕이었다. 어머니가 연못의 용과 통하여 낳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그는 주류 왕실 혈통에서 벗어난 방계 출신이었다. 기반이 약했던 서동에게는 귀족들을 압도할 강력한 '한 방'이 절실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바로 '서동요'*3다. 우리는 이 노래를 국경을 초월한 로맨스로 알고 있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왕은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덮기 위해 '신라 왕의 사위'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서동요라는 노래를 퍼뜨려 기정사실로 만들거나, 혹은 그런 소문을 이용해 자신을 비범한 존재로 포장하려 했던 고도의 정치 공작(프로파간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한 마 장수(서동)가 적국인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가, 서동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귀족들 입장에서도 진위 여부를 떠나, 민심을 등에 업고 신비주의 전략을 펼치는 왕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서동요는 약한 혈통을 극복하기 위한 무왕의 치밀한 언론 플레이였던 셈이다.


무왕은 이 기세를 몰아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며 권력을 과시했다. 미륵사지는 원래 거대한 습지 자리라고 한다. 당시 백제는 이를 메워 단단한 대지를 조성하는 간척 사업급 토목 기술을 선보였다. 쓸모없는 땅을 국가를 상징하는 절로 바꿀 만큼, 당시 백제의 기술력과 토목사업을 총괄하는 행정력,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왕권은 귀족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내용을 따지고 보면,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물려받은 나라는 망해가는 나라가 아니라, 성왕과 무왕이 피땀 흘려 구축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최고의 시스템과 풍요로운 경제력, 그리고 강력한 왕권. 이 모든 최상의 조건이 의자왕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가장 완벽해 보이는 전성기 끝에 가장 허무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이것이야말로 백제 역사가 우리에게 강하다고 느낄 때 더 노력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던지고 있는건 아닐까.


  1. *1 김부식이 쓴 정사(正史) 『삼국사기』에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 당시 거느린 병력을 '보기오십(步騎五十)' 즉 보병과 기병 50명'이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왕이 전투 병력이 아닌 최소한의 경호 병력만 대동한 채 은밀히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2. *2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전사한 백제 성왕의 머리를 잘라 신라 관청의 계단 밑에 묻었다고 한다. 이는 오가는 사람들이 왕의 머리를 밟고 지나다니게 하려는 신라의 의도적인 모욕이었다. 귀족들의 방관 속에 왕이 적국의 계단 밑에 깔리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은, 백제 왕의 권위가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추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3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사찰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며 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를 세운 주역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 '사택왕후'였기 때문이다. 이 발견은 우리가 알던 서동요의 로맨스가 사실은 무왕의 치밀한 정치적 창작물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즉,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신라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가짜 뉴스를 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선화공주는 가상의 인물이 된다. 그래서 사택왕후와 선화공주 모두를 부인으로 보는 학설도 존재한다.(얼마 전해지지 않는 백제 왕후를, 그것도 여러 스토리가 엮인 선화공주를 가상의 인물로 보긴 아까웠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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