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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백제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보통 백제라고 하면 충청남도 공주(웅진)나 부여(사비)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유적지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주가 수도였던 웅진 시대(475~538)는 백제 역사 700년 중 고작 63년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짧은 시기는 백제 왕실에 있어 지옥과도 같았다. 웅진 시대를 거쳐 간 5명의 왕 중, 천수를 누리고 죽은 왕은 오직 무령왕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신하의 칼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오늘 이야기는 백제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위기의 순간, 그리고 왕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웅진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의 이야기다.
바둑 한 판에 무너진 백제의 뿌리 위례성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한성(위례성)을 포위했을 때, 백제의 운명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도성은 불탔고, 왕과 백성들은 아비규환 속에 흩어졌다.
당시 백제 국왕 개로왕은 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군주였다. 개로왕은 중국 북위와 외교를 맺어 고구려를 고립시키려 했을 만큼 야심만만했다. 하지만 개로왕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바둑이었다.
고구려의 첩자 승려 도림은 이 점을 파고들었다. 도림은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부추겨 백제의 국고를 바닥내버렸다. 안에서부터 곪아 터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끌려가 적군에게 처형당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참수당했다는 사실은 백제의 자존심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의미했다.*1 구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태자 문주가 돌아왔을 때, 문주가 마주한 것은 폐허가 된 수도와 아버지의 죽음뿐이었다.
왕들의 무덤이 된 웅진, 요새인가 감옥인가
문주왕은 즉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감행했다. 천도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필사적인 도주였다. 웅진은 험준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기에 방어에는 유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폐쇄적인 지형은 왕실을 옥죄는 감옥이기도 했다.
문제는 웅진으로 온 뒤에도 왕실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성에서 내려온 기존 귀족 세력은 패배감에 젖어 있었고, 웅진에 뿌리내리고 있던 토착 세력은 굴러온 돌인 왕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권은 이 두 세력 사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온 지 불과 3년 만에 신하 해구에게 암살당했다. 뒤를 이은 삼근왕은 고작 13살에 즉위했으나, 실권자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왕인 동성왕 역시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으며 국력을 회복하려 애썼지만, 결국 신하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웅진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불안과 공포였다. 무령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모든 왕이 피살당했다.*2 왕이 귀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허울뿐인 존재로 전락했던 시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막연히 아름답게만 생각하는 공주, 웅진 시대의 진짜 얼굴이다.
22담로와 화려한 무령왕릉
연이은 왕들의 죽음으로 백제의 명운이 다해갈 때, 반전의 주인공이 등장하니 바로 무령왕이다. 유일하게 암살의 사슬을 끊어낸 왕이기도 하다.
무령왕은 선대 왕들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다. 무령왕은 22담로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왕족들을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왕의 통제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만든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이었다.
무령왕이 되살린 백제의 국력은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3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무덤은 중국 양나라 양식의 벽돌로 축조되었고, 왕의 관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최고급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웅진이라는 좁은 지역에 천도해 있었지만, 백제의 외교는 결코 갇혀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백제가 당시 중국,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며 국제적인 관계를 회복했고, 이를 통해 다시금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되찾았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역사적 증거다. 벼랑 끝에 몰렸던 백제는 이처럼 안으로는 왕족 중심의 통제(22담로)를, 밖으로는 활발한 외교를 펼친 무령왕 덕분에 다시 강국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 *1 개로왕의 죽음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백제는 고대 성읍(도시) 국가에서 출발했다. 즉, 수도가 곧 백제 왕실의 핵심 기반이자 심장이었다. 따라서 한성(위례성)이 털리고 왕이 죽었다는 건 단순히 영토 일부를 잃은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의 심장이 뽑힌, 사실상 뇌사 상태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웅진 천도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국가의 명운을 건 처절한 도주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 63년이라는 짧은 웅진 시대, 왕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다. 무령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어진 피의 기록을 보면 당시 왕권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 알 수 있다. * 문주왕 - 병관좌평 해구에게 암살 * 삼근왕 -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 (실권자 해구에 의한 암살 추정) * 동성왕 - 위사좌평 백가에게 암살 즉, 웅진 시기를 이끌었던 4명의 왕 중 무령왕을 제외한 모든 왕이 신하의 칼에 비명횡사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 *3 삼국시대의 수많은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100% 명확하게 밝혀진 곳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우리가 아는 신라의 천마총이나 고구려의 장군총도 주인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이나 생김새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지석(돌판)이 함께 나와 1500년 전의 비밀을 완벽하게 풀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