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 4 –중종 인종 명종 가계도로 보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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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조선왕계보를 보기에 앞서

조선 역사상 왕을 뛰어넘는 권력을 휘두른 여인을 꼽으라면, 단연 이 사람이다. 바로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다.


임금이 셋(중종, 인종, 명종)이나 바뀌는 격변의 시기, 그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항상 문정왕후가 있었다. 세자의 자애로운 계모에서, 친아들을 왕으로 만든 비정한 승부사, 그리고 수렴청정을 통해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여왕' 같은 존재.


왜 문정왕후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실세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논란과 평가의 중심에 서 있는지 그 파란만장한 권력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문정왕후는 원래 현모양처?

1517년, 문정왕후는 중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당시 왕세자(훗날 인종)는 일찍 세상을 떠난 전 왕비(장경왕후)의 아들이었는데, 입궁 초기 문정왕후는 어린 세자를 친아들처럼 정성껏 돌보며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게 흘러갔다. 문정왕후가 34세의 늦은 나이에 덜컥 자신의 친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으면서 궁궐의 공기는 급변한다.


자신의 핏줄인 경원대군이 태어나자, 문정왕후의 모성애는 곧 권력욕으로 변질되었다. 자애롭던 보호자가 하루아침에 세자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문정왕후는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동생 윤원형을 필두로 친정 세력을 규합해 '소윤(小尹)'이라는 정치적 파벌을 만들었다. 이에 맞서 세자(인종)를 지지하는 외삼촌 윤임의 '대윤(大尹)' 파와 치열한 암투가 시작*1되었다.

중종이 승하하고 세자 인종이 즉위했으나, 병약했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2한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친아들인 경원대군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13대 왕 명종이다.


왕이 너무 어렸기에, 왕실의 큰 어른인 문정왕후가 왕의 뒤에 발을 치고 정치를 대신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3을 시작했다. 명분은 '어린 임금의 보좌'였지만, 실상은 문정왕후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문정왕후는 집권하자마자 피바람을 일으켰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통해 라이벌이었던 대윤 세력과 선비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버렸다. 하지만 공포 정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4*5을 통해 정점을 찍는다.


이 사건 이후, 내수사(왕실 재정 담당)는 사실상 문정왕후의 사금고가 되었고 조선의 통치 시스템은 왕이 아닌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완벽한 '문정왕후의 천하'가 되었다.


문정왕후는 유교(성리학)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국정 차원으로 불교를 부흥*6시킨 파격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준하는 권한을 주었고, 사라졌던 승과(승려 과거 시험)와 도첩제(승려 신분증 제도)를 부활시켰다. 숭유억불(유교 숭상, 불교 억압)이 국시인 조선에서 이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문정왕후의 신앙심 깊은 행동으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조정의 신료들(사림파)은 끊임없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견제하고 비판했다. 문정왕후 입장에서 사림의 사상적 기반인 성리학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따라서 불교 부흥은 사림 세력을 누르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보였다. 즉, 불교는 문정왕후에게 또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던 셈이다.


물론 그 끝은 좋지 못했다. 유생들은 승려 보우를 요승이라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했고, 훗날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보우는 유배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고 만다.


  1. *1 흥미롭게도 대윤의 윤임과 소윤의 윤원형은 모두 '파평 윤씨' 가문 사람들이다. 파평 윤씨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결국 이 싸움은 "어느 윤씨 왕비(장경왕후 vs 문정왕후)의 라인을 탈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처참한 집안 내전이었던 셈이다.
  2. *2 조선 대표적인 야사 『연려실기술』에는 문정왕후가 웃으며 건넨 떡(다식)을 먹고 인종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사(실록)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문정왕후를 얼마나 악덕한 존재로 여겼는지 보여준다.
  3. *3 조선 역사상 수렴청정은 총 7번 있었는데, 그 문을 연 것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였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수렴청정을 한 게 바로 문정왕후다. 하지만 두 사람의 통치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정희왕후가 신하들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뤘다면, 문정왕후는 신하들 머리 꼭대기 위에서 군림하는 강력한 독재를 보여주었다.
  4. *4 양재역의 벽에 "여자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들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니 나라가 망하려 한다"는 익명의 비방글이 붙은 것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남아있던 사림 세력과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며 권력을 공고화 했다(정미사화).
  5. *5 당시 양재역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 벽서를 붙였다는 건 오늘날로 치면 "SNS나 포털 사이트 메인에 비방글을 올린 것"과 같은 엄청난 파급력을 노린 행위였다. 문정왕후는 이를 역이용해 반대파를 일망타진했다.
  6. *6 문정왕후의 친불교 정책은 세조와 판박이다. 세조 역시 유교 국가의 국왕임에도 원각사를 짓고 불경을 간행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두 사람 모두 정통성의 약점(계유정난 vs 수렴청정)을 만회하고 깐깐한 유교 신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불교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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