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세 번째 조선왕계보를 살펴보기 앞서
‘폭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국인 열에 아홉은 이 사람을 떠올린다. 바로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이다. 하지만 연산군을 단지 "성격이 포악하고 미친 왕"으로만 정의하는 건 역사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연산군이 통치하던 시기는 조선의 국가 시스템이 완성되고 경제·외교적으로 가장 안정된 '황금기'였다. 게다가 왕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嫡長子)’로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정통성을 쥐고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완벽한 조건 위에서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괴물이 탄생했을까? 오늘은 성종과 연산군 가계도를 통해, 그의 폭정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역설적인 관점에서 짚어보려 한다.
폭정이 가능했던 3가지 이유
연산군의 폭정을 단순히 개인의 우발적인 기행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물론 왕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선대 왕들이 물려준 '완벽한 유산' 덕분이었다.
1. 풍족한 곳간 (농업 혁명)
할아버지 세조와 아버지 성종을 거치며 조선의 경제력은 정점을 찍었다.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이 널리 보급되면서 조선의 토양에 맞는 농업 기술이 체계화되었고, 모내기법(이앙법)이 남부 지방으로 확산되며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1 즉, 왕이 사치를 부려도 당장 나라가 망하지 않을 만큼 국고가 넉넉했다는 뜻이다.
2. 시스템의 완성 (경국대전)
아버지 성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이 반포(1485)되며 국가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세금 징수부터 행정 절차까지 모든 것이 법으로 딱딱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연산군이 골치 아픈 민생 문제나 행정 공백에 신경 쓰지 않고, 안정적으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3. 평화의 시대
대외적인 위협도 없었다. 세종 대의 4군 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 덕분에 북방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는 잠잠했다. 국경이 평온하니 왕은 전쟁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남아도는 군사력*2과 정치적 에너지는 고스란히 내부의 신하들을 억누르는 데 사용되었다.
'완벽한 적장자'의 폭주
무엇보다 연산군을 '괴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가계도에 있다.
태종은 셋째였고, 세종도 셋째였으며, 세조는 둘째였다. 조선의 기틀을 다진 강력한 왕들은 모두 '적장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 속에서 신하들의 눈치를 보며 정통성을 증명해야 했다.
물론 그 이전에 문종과 단종이 적장자로 왕위에 올랐으나, 문종은 병약하여 일찍 승하했고 단종*3*4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비극을 겪었다. 즉, 적장자의 권위가 제대로 꽃피지 못한 채 꺾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달랐다. 선대 왕들이 겪은 정통성 시비나 단종과 같은 위협 없이, 가장 완벽한 상태의 적장자 프리미엄을 안고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의 존재 자체가 완벽한 정통성이었기에, 신하들은 감히 왕의 결정에 토를 달 명분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폐비 윤씨)가 쫓겨나 죽은 약점마저, 연산군은 신하들을 숙청하는 칼자루*5로 사용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완벽한 정통성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연산군의 시대는 조선 전기 3대 군주(세종-세조-성종)가 이룩한 태평성대의 결과물이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안정, 그리고 완벽한 혈통적 정통성. 이 모든 최상의 조건이 현군(賢君)을 만났다면 조선은 더 크게 도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힘은 나라의 발전이 아닌 왕 개인의 사치와 향락으로 흘러갔다. 우리가 잘 아는 '흥청망청(興淸亡淸)'*6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넘쳐나는 국부(國富)가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가장 완벽한 시스템 위에서 가장 끔찍한 폭군이 탄생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연산군이 조선 역사에 남긴 가장 뼈아픈 아이러니가 아닐까.
- *1 사실 조선 초기까지 조정에서는 모내기법(이앙법)을 금지했었다. 가뭄이 들면 한 해 농사를 통째로 망칠 수 있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농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종 대에 이르러 저수지 등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이 위험한 도박이 '대박'으로 이어졌고, 그 과실이 고스란히 연산군의 주머니로 들어간 셈이다.
- *2 연산군은 남아도는 이 군사력으로 자신의 취미인 '사냥'에 동원했다. 서울 근교(지금의 은평구, 고양시 일대)의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거대한 사냥터(금표)를 만들었는데, 이때 백성을 쫓아내고 짐승을 모으는 일에 정예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 *3 단종이 숙부(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유는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단종을 지켜줄 왕실의 어른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연산군은 19세의 성인으로 즉위했고, 등 뒤에는 예종의 적장자가 있음에도 아들 잘산대군(성종)을 왕으로 만든'킹메이커'이자 당대 최고의 여걸인 할머니 인수대비가 버티고 있었다. 즉, 연산군에게는 신하들이 감히 딴마음을 품을 수 없는 완벽한 권위를 지닌 방어막이 존재했던 셈이다.
- *4 연산군을 지켜주던 할머니 인수대비의 최후는 비참했다. 훗날 생모(폐비 윤씨)의 죽음에 할머니가 개입된 사실을 안 연산군은 병석에 누운 인수대비에게 폭언을 퍼붓고(혹은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야사도 전해짐), 결국 그 충격으로 인수대비는 세상을 떠났다.
- *5 목에 건 경고장, 신언패(愼言牌): 연산군 말기에는 아예 신하들의 입을 막기 위해 목에 나무패를 걸고 다니게 했다. 그 패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라고 적혀 있었다. 즉, "내 앞에서 입 뻥끗하면 죽는다"는 살벌한 협박이었다.
- *6 연산군은 전국 각지의 미녀 1만 명을 징발해 궁으로 들였는데, 이들을 '흥청(興淸: 맑은 기운을 일으키다)'이라 불렀다. 하지만 맑은 기운은커녕 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하여 백성들이 '흥청망청(흥청 때문에 망했다)'이라 비꼬아 부른 것이 오늘날의 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