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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백제는 건국 초기 왕위 계승 원칙이 명확하지 않아 오랜 기간 혼란을 겪었다. 13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서야 왕통을 확립하고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백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왜(일본)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의 등장
백제는 초기부터 온조계와 비류계 등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특히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대립하며 왕위를 교대로 차지하는 등 왕실 내 정통성 확립이 미비했다. 8대 고이왕이 국가 기틀을 다졌음에도, 명확한 원칙 없는 왕위 계승 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왕실의 혼란을 종식시킨 것은 근초고왕이다. 왕위 계승을 초고왕계로 일원화했다. 선대 왕인 초고왕과 구수왕의 이름에 '근(近)'을 붙인 것에서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내부를 안정시킨 백제는 역사서 《서기(書記)》*1를 편찬했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을 시작했다. 남쪽의 마한 잔여 세력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대방·낙랑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격돌해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시기에 중국 동진 및 왜와 최초로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2했다.
광개토대왕과 백제의 굴욕
고국원왕의 손자인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며 상황은 반전된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수도 위례성이 함락 위기에 처하자, 백제 아신왕은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3며 항복했다.
위기에 처한 백제는 전지왕을 왜에 파견해 군사적 협력을 모색했다. 근초고왕 대에 시작된 왜와의 외교는 이후 무령왕, 성왕 시대까지 백제의 핵심 외교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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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기'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학자와 관료 등의 영향으로 일본에선 '역사서=서기'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의 고대 역사를 담은 책 이름이 '일본서기'인 이유다.) -
*2
《일본서기》에 백제와의 공식 교류가 근초고왕(초고왕) 때부터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일본 내 일부 역사서나 보수 사학계에서는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과 국가적 기틀을 이 시기부터로 한정 지어 서술하는 경향이 짙다.
일본의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근초고왕 시기 이후부터를 백제의 실질적 시작으로 보고, 그 이전의 역사는 신빙성이 낮다며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백제가 일본 천황에게 칠지도를 '바쳤다(헌상)'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기록의 앞뒤를 맞추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해석이다. -
*3
百殘王生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백제 왕이 곤경에 빠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왕(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제2면 영락 6년(3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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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학자와 관료 등의 영향으로 일본에선 '역사서=서기'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의 고대 역사를 담은 책 이름이 '일본서기'인 이유다.) -
*2
《일본서기》에 백제와의 공식 교류가 근초고왕(초고왕) 때부터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일본 내 일부 역사서나 보수 사학계에서는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과 국가적 기틀을 이 시기부터로 한정 지어 서술하는 경향이 짙다.
일본의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근초고왕 시기 이후부터를 백제의 실질적 시작으로 보고, 그 이전의 역사는 신빙성이 낮다며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백제가 일본 천황에게 칠지도를 '바쳤다(헌상)'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기록의 앞뒤를 맞추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해석이다. -
*3
百殘王生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백제 왕이 곤경에 빠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며 왕(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제2면 영락 6년(39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