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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선왕조계보를 보기에 앞서
‘수양대군’. 우리에게는 왕으로서의 묘호인 '세조'보다, 야심 가득했던 왕자 시절의 이 이름이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오늘 살펴볼 인물은 바로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다.
흔히 그를 떠올리면 "조카를 몰아낸 비정한 삼촌" 혹은 "계유정난의 피비린내"를 먼저 기억한다. 하지만 세조를 단지 '왕위 찬탈자'로만 규정하기엔,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남긴 발자국이 너무나 깊고 뚜렷하다.
그는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통치 스타일은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아버지의 시대가 '토론과 문치'였다면, 아들의 시대는 '힘과 효율'이었다. 비록 과정은 피로 얼룩졌을지언정, 혼란스러운 조정을 수습하고 조선을 제도적으로 완성해 낸 '실력파 군주'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세조가 조선에 어떤 명과 암을 남겼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태조에서 태종, 그리고 세종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가계도의 흐름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왕위 욕심 만큼 능력도 있던 '수양대군'
세종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저물고 문종마저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나자, 조선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왕위에 오른 단종은 너무나 어렸고, 조정은 흔들렸다. 이 혼란의 틈을 파고든 야심가가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1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문종의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1455년, 마침내 조카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유배지로 보내진 단종이 영월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자, 세조는 반대파의 구심점이 사라진 틈을 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며 왕권을 안정시켰다.
비록 피로 얻은 왕위였지만, 세조는 역시나 세종의 아들답게 탁월한 행정가였다. 취약한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압도적인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조는 조선 법 체계의 근간이 되는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2해 법치 국가의 기초를 다졌고, 노비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 되는 ‘일천즉천 *3원칙을 도입해 신분 질서를 명확히 했다.
'형님 리더십'과 훈구파의 탄생
세조의 정치 철학은 무엇보다 ‘효율’이었다. 아버지 세종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토론하며 '숙의 민주주의'를 펼쳤다면, 세조는 충성심과 실력을 갖춘 소수 정예에게 파격적인 힘을 실어주는 '속전속결' 방식을 택했다.
이때 중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명회와 신숙주다.
특히 변절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중용된 신숙주*4, 그리고 세조의 그림자이자 책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한명회는 세조 정권의 쌍두마차였다. 한명회의 권력은 단순한 조력자 수준을 넘어섰는데, 결국 자신의 딸들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며 2대에 걸친 왕의 장인(국구)으로서 조선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세조는 피로 얻은 권력을 제도로 바꿔 조선을 체계적인 국가로 만들었고, ‘힘의 통치’와 ‘법의 통치’를 절묘하게 병행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능력만 있다면 도덕성은 눈감아주는" 그의 용인술은 훗날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충성파 중심의 정치 운영은 단기적으로 효율을 높였지만, 권력을 독점한 공신 세력은 이후 '훈구파(勳舊派)'라는 거대 기득권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권력 비대화와 비리 은폐를 일삼았고, 이를 비판하는 지방 사림 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다.
특히 한명회처럼 정권의 핵심 인물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실권까지 쥐는 구조는, 공신이 왕권을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세조식 정치의 짙은 그림자는 손자인 성종 시기에 이르러 [훈구 vs 사림]의 갈등으로 폭발하게 되며, 결국 조선 중기를 피로 물들인 '사화(士禍)'의 씨앗이 되었다.
- *1 계유정난이 일어난 날 밤,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대궐 문 앞에서 '살생부(죽일 자와 살릴 자의 명단)'를 손에 쥐고 있었다. 신하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의 손짓 하나에 목숨이 오갔는데, 김종서와 황보인 등은 모두 이날 밤 제거되었다. 영화 <관상>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이 장면이다.
- *2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지만,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당대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손자인 '성종' 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 및 반포가 이루어진다. 성종의 묘호가 '이룰 성(成)'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법전의 완성 덕분이다.
- *3 흥미로운 점은 할아버지 태종의 정책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태종은 세금 낼 백성(양인)을 늘리기 위해 아버지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노비종부법'을 썼다. 반면 세조는 자신을 도운 공신들의 재산(노비)을 불려주기 위해 '일천즉천(한쪽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을 법으로 못 박았다. 이는 훗날 조선 신분제의 족쇄가 된다.
- *4 우리가 즐겨 먹는 나물 이름에 신숙주의 사연이 담겨 있다는 설이 있다. 본래 이름은 '녹두나물'이었는데, 사육신을 배신하고 수양대군 편에 선 신숙주처럼 '이 나물이 잘 쉬어버린다(상한다)' 하여 백성들이 조롱의 의미로 '숙주나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