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계보2 - 초고왕, 고이왕, 비류왕 가계도와 초고왕계 고이왕계 알아보기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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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초기 왕실의 계보는 사료 부족과 후대 편집의 가능성으로 인해 복잡하고 의문점이 많다. 특히 고이왕의 등장과 왕위 계승 과정은 기존 왕통과의 단절, 출신 및 재위 기록의 불확실성 등으로 학계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이번 가계도에서는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를 중심으로 백제 초기 왕위 계승의 미스터리를 조명하고, 고이왕 시기의 국가 체제 정비 내용과 왕의 출신에 관한 여러 학설을 소개해보려 한다.

2. 배경

백제 초기 왕실의 계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후대에 편찬되었으며,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거나 특정 계보를 부각하기 위해 내용이 윤색되거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사료의 한계는 온조왕, 비류왕,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초고왕과 고이왕에 이르는 초기 왕들의 계보에 불확실성을 가중했다. 특히 고이왕 이전의 왕계는 비류계와 온조계, 혹은 그 외의 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혀 왕위를 다투던 시기로 추정되며, 고이왕의 등장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3. 고이왕의 통치와 국가 체제 정비

고이왕은 백제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왕이다. 고이왕6좌평과 16관등제를 도입하여 백제의 관료 조직을 체계화했다. 6좌평은 고위 관직으로 행정 실무를 총괄했으며, 16관등제는 관리의 등급을 세분화하여 관료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고이왕은 공복제를 제정하여 관리에 등급에 따른 복색을 규정했다. 이는 관료 체계의 시각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고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조치였다.


율령 반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삼국사기》는 고이왕이 뇌물을 받은 관리와 도둑질한 사람을 처벌했다는 내용을 전한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보고 고이왕 시기에 국가의 법률과 제재 규정이 확립되었다고 판단한다. 백제는 이를 통해 율령 국가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는 낙랑과의 기리영 전투를 통해 백제의 군사력을 과시했다.


고이왕 시기에 백제의 주요 방어 시설인 풍납토성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략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백제가 고이왕 시기에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하고 대외적인 군사력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재의 체계적인 관등제나 율령의 완비는 후대에 완성된 것을 고이왕 시기로 소급하여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4. 전개

4.1 고이왕 출신 및 나이 기록의 미스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이왕을 초고왕의 "모제(母弟)"로 기록한다. 모제를 같은 어머니를 둔 동복(同腹) 아우로 해석할 경우, 고이왕과 초고왕 사이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커서 혈연관계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초고왕이 기원전 214년에 태어나 234년에 죽었고, 고이왕은 234년에 즉위했다. 만약 고이왕이 초고왕과 동복 아우라면 초고왕의 죽음과 동시에 태어났다 해도 고이왕이 즉위 당시 68세가 되고, 재위 53년 후 120세에 사망하게 된다. 이는 고대 시대의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비상식적인 기록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나이 기록은 고이왕의 출신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모제'를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이 기존의 주류 왕계가 아닌 우태 또는 비류계 출신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또한, 고이왕이 백제의 시조로 알려진 '구태'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이는 '고이'와 '구태'의 발음 유사성에 기반한 가설로, 백제 초기 건국 세력이 고이왕과 관련이 있음을 추정한다. 이처럼 고이왕의 출신과 나이에 대한 기록의 불확실성은 백제 초기 왕위 계보의 혼란을 보여준다.

4.2 학설

고이왕의 불확실한 출신 배경과 비정상적인 나이 기록은 백제 왕계의 전환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촉발했다. 주된 학설은 아래와 같다.


천관우 선생은 백제 초기에 우태-비류-고이를 잇는 '고이계'와 주몽-온조-초고를 잇는 '초고계'라는 두 왕통이 병존했다고 주장한다. 천관우의 학설에 따르면 고이왕의 즉위는 기존 온조계 중심의 왕통에서 비류계로 왕통이 교체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고이왕이 기존 왕실과는 다른 세력의 수장이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노중국 교수는 다루왕부터 개루왕까지를 '비류계'에 속하는 왕들로,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온조계'에 속한다고 해석한다. 노중국의 학설은 고이왕이 비류계가 아니며, 기존의 주류 왕실 외곽에 있던 방계 세력이 성장하여 왕위를 차지한 결과로 본다. 이 관점은 고이왕의 등장이 단순한 왕통 교체가 아니라, 당시 백제 내부의 여러 정치 세력 간의 역학 관계 변화를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5. 결과 및 평가

을 통해 관료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고, 법률적 통치를 강화하여 율령 국가로 나아가는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고이왕의 출신과 나이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의 비현실성은 백제 초기 왕실 계보의 불투명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이왕의 등장은 기존 온조계 왕통과의 단절, 혹은 특정 세력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내포한다. 학계는 천관우의 비류계 왕통 교체설과 노중국의 방계 세력 성장설 등을 통해 고이왕의 위상과 백제 초기 왕계의 복잡성을 설명한다.


고이왕은 백제 초기 기틀을 잡았기에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고이왕 둘러싼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는 백제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이 단순한 단일 왕통의 흐름이 아닌, 여러 세력의 복잡한 통합과 재편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고이왕과 비류왕을 포함한 백제 초기 왕들의 불확실한 기록은 백제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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