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계보1 -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로 보는 신라 초기 가계도

👑 한국사 가계도 시리즈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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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무려 천 년을 이어온 왕국이다.*1 그 수도였던 경주는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곳이다. 하지만 이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왕실의 계보 또한 얽히고설켜, 그 실체를 한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 글은 어렵고 복잡한 신라 왕조의 계보를 풀어나가는 긴 시리즈의 첫 번째 순서다. 여기서는 신라 초기 왕실의 가계도, 특히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시기를 중심으로 기록의 특수성과 학계의 주요 쟁점을 짚어보려 한다.

이번 시리즈가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신라 왕실의 가계도를 이해하고, 더불어 알찬 역사 상식까지 채워가는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2. 배경

한반도 고대사, 그중에서도 신라 초기 역사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문헌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경주에 산재한 거대한 고분들이 신라의 실존을 말하고 있지만, 유물만으로는 초기 지배층의 복잡한 계보와 통치 구조를 온전히 복원하기에 한계가 뚜렷하다.

우리들에게 신라는 수학여행의 추억으로 친숙할지 모르나, 그 이면에 감춰진 초기 왕실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생소한 영역이다. 이러한 역사적 공백과 불확실성은 이번 시리즈가 제시할 '신라 왕 계보'를 무조건적인 정답이 아닌, 비판적 탐구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3. 전개

3.1. 초기 신라사 기록의 특수성

신라 초기 왕조의 가계도를 확정하는 작업은 다른 시대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다. 가장 큰 이유는 당대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대사 연구는 대부분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다.*2  물론 『삼국사기』는 국가 공식 역사서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초기 기록만큼은 후대에 윤색되거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건국 신화적 요소가 짙게 나타나는데, 이는 후대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었을 여지가 크다.

3.2. 『삼국사기』 기록의 한계와 교차 검증의 필요성

『삼국사기』는 신라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차적 사료이나,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동시대 기록과 대조했을 때 연대나 사건 서술에서 불일치하는 사례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의 신뢰성을 재확인하며, 이 과정에서 고고학적 발굴 성과나 금석문 등 다른 물적 증거들이 진실을 보완하는 중요한 열쇠로 활용된다.

3.3.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가계도 논란의 핵심

신라 초기 왕통은 박혁거세, 석탈해, 그리고 김알지 가문의 교체로 특징지어진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를 각각 시조와 제4대 왕으로, 김알지는 훗날 김씨 왕조의 기원이 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3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이 시기는 박·석·김 세 세력이 연맹하여 왕위(이사금)를 교대로 차지하는 연립 정권의 성격이 강했다.*4 이는 아직 왕권이 절대화되지 않았던 고대 국가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세 가문의 등장 배경이나 후대 왕들과의 연결 고리가 기록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후대에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복잡했던 당시의 계보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3.4. 일성 이사금 가계 논쟁 사례

신라 제7대 왕 일성 이사금의 가계는 『삼국사기』 기록과 현대 학계의 견해 사이에 괴리가 큰 대표적인 사례다. 『삼국사기』는 일성을 유리 이사금의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유리 이사금의 사망(서기 57년)과 일성 이사금의 즉위(서기 134년) 사이에는 약 77년이라는 긴 공백이 존재한다. 물리적으로 부자 관계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5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그를 유리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 왕족, 혹은 전혀 다른 세력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논란은 당시 기록의 불완전성이나 후대 편찬 과정에서의 왜곡 가능성을 시사한다. 역사적 통설은 획기적인 유물이나 새로운 사료의 발견으로 언제든 뒤집힐 수 있으며, 신라 초기 가계도 역시 확정된 정답이 아닌 '열린 결말'로 남아 있다.

4. 결과 및 평가

신라 초기 왕 계보는 여전히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삼국사기』와 같은 일차 사료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나, 기록의 편향성과 공백으로 인해 그 자체로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역사학계는 문헌 간의 교차 검증과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은 마치 깨진 거울 조각을 모아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비록 온전한 모습을 즉각 확인할 수는 없더라도,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고대사 연구의 본질이자 가치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1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초기 국가 단계인 '사로국(斯盧國)' 시기로 본다.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통상 내물 마립간(4세기 후반) 이후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즉, 기원전 57년은 신라라는 정치 집단의 태동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2. *2 『삼국사기』가 편찬된 1145년은 신라 건국으로부터 무려 1,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김부식은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기록을 정리했기에, 당시 전해지던 설화나 신비로운 이야기(기이편)를 중심으로 다룬 일연의 『삼국유사』와는 서술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초기 기록의 빈약함은 이러한 긴 시간적 공백과 편찬자의 합리주의적 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3. *3 김알지 본인은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탈해 이사금의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파사 이사금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에 와서야 비로소 김씨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다시 석씨에게 왕위가 넘어갔다가 내물 마립간 때부터 김씨의 독점 세습이 이어진다. 따라서 '김알지 가계'라고 할 때, 이는 김알지 개인이 아닌 경주 김씨 집단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4. *4 이 시기에는 '왕(王)'이라는 중국식 호칭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의 고유 칭호를 사용했다.
    특히 박·석·김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던 시기는 주로 '이사금(尼師今, 연장자 또는 계승자)'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혈통에 따른 독점적 세습보다는 유력 집단 간의 합의나 추대로 지도자를 선출했음을 시사한다.
    김씨의 독점적 세습이 확립된 내물왕 시기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쓰이기 시작했다.
  5. *5 단순히 일성 이사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라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과 수명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평균 수명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학계에서는 이를 '상대(上代) 왕계의 연대 늘리기'로 보기도 하며, 기록에서 누락된 왕이나 잊힌 세대가 존재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기록이라도 실제로는 할아버지와 손자, 혹은 그보다 더 먼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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