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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계보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역사인 조선시대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번 시리즈를 통해 조선왕조 계보, 더 넓게는 조선의 역사를 가계도와 함께 짚어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피로 권력을 설계한 태종 이방원, 그리고 한국사 최고의 군주 세종의 가계도를 다룬다.
특히 이번 글에서는 태종 이방원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다.
태종, 그 지독한 콤플렉스에 대하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면, 태종 이방원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뼈대'를 다시 조립했다. 하지만 태종을 단순히 '냉혹한 킬러'로만 기억한다면, 그건 역사의 절반만 본 셈이다. 그가 휘두른 칼날 뒤에는 '정통성 부재'라는 깊은 콤플렉스가 숨겨져 있었다.
형제들의 피를 밟고 왕좌에 오른 그에게 "장자도 아니요, 부왕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는 낙인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역설적이게도 태종이 그토록 '국가 시스템' 구축에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에게 정통성이 부족하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완벽한 통치 기틀'을 세워 왕권을 방어하겠다는 철저한 계산이었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사적인 인연이나 가문의 힘이 아닌, 오직 '공적인 법과 제도'로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군사력이었다. 자신이 사병(私兵) 덕분에 왕이 되었기에, 그 칼끝이 언제든 자신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사병을 혁파하고 모든 군사권을 국가로 귀속시켰다.
행정 시스템도 완전히 뜯어고쳤다. 신하들이 모여 의논하던 의정부를 건너뛰고, 실무 부서인 6조가 왕에게 바로 보고하게 만드는 '6조 직계제'를 실시했다. 왕이 국정의 모든 것을 직접 챙기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여기에 호패법으로 인구를 파악하고 양전으로 숨겨진 토지를 찾아내어 세금과 군역의 기반까지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태종의 이러한 개혁은 고려의 잔재를 지우고 조선만의 시스템을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구분 | 태종 이전 (고려~조선 초) | 태종의 개혁 (시스템 구축) |
|---|---|---|
| 군사 | 왕실과 귀족이 사병을 보유함 | 사병 혁파 (군사권의 국가 독점) |
| 행정 | 신하 중심의 합의제 (의정부 서사제) | 6조 직계제 (왕 중심의 직할 통치) |
| 사회 | 구 및 토지 파악 미비 | 호패법 & 양전 (세금/군역 확보) |
양녕대군을 끝까지 놓지 못한 속내
태종의 이러한 '정통성 콤플렉스'가 가장 적나라하게 투영된 대상이 바로 장남, '양녕대군'이다.
우리는 흔히 양녕이 기행을 일삼아 폐세자 되었다고만 알고 있다. 하지만 태종은 아들의 일탈을 눈물겨울 정도로 오랫동안 인내했다. 단순히 아들을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다. 태종에게 양녕은 '자신의 과오를 씻어줄 유일한 희망'이자,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조선'의 마침표였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형들을 베고 왕이 되었을지언정, 내 아들만큼은 '적장자(정실부인의 첫째)'로서 당당하게 왕위를 계승하길 갈망했다. 그래야만 피로 얼룩진 건국의 역사가 비로소 '정상적인 왕조'의 궤도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태종에게 '적장자 승계'는 단지 첫째에 물려준다는 의미 그 이상을 지녔다. 자신이 피를 묻혀가며 닦아놓은 시스템 위에 정통성 있는 왕을 앉힘으로써, 자신의 '찬탈'을 역사가 아닌 '건국'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려는 거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피의 찬탈'을, 안정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안정적인 유교 국가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던 양녕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완벽한 정통성으로 자신의 흠결을 덮으려 했던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그러나 양녕의 끝없는 일탈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셋째 아들 세종을 위해 자처한 '악역'
결국 양녕은 선을 넘었고, 태종의 오랜 숙원이었던 '적장자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태종 이방원이라는 정치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보통의 권력자라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어 끝까지 미련을 두거나 결단을 미뤘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달랐다. 자신의 계획이 일그러졌음을 직감하자마자, 감상에 젖는 대신 극도로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다. 썩은 살은 도려내고, 가장 싹수가 좋은 재목을 골라 다시 심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는 피눈물을 머금고 장남 양녕을 폐세자시킨 뒤, 셋째 아들 충녕(세종)을 새로운 후계자로 지목했다. 명분(장자)보다 실리(능력)를 택한, 조선의 운명을 바꾼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후계자를 바꿨다고 끝이 아니었다. 태종에게는 또 다른,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가 찾아왔다.
자신이야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로 신하들이 감히 정통성 시비조차 걸지 못하게 찍어 눌렀지만, 세종은 달랐다. 카리스마 보다는 글을 좋아하는 스타일인 데다, 결정적으로 자신처럼 적장자가 아닌 '셋째 아들'이라는 태생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늙은 공신들이 장자도 아닌 왕이라며 어린 세종을 흔들어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고도 4년 동안이나 '상왕(上王)' 자리에 머물며 버티고 있었다. 이는 권력을 놓기 싫은 노욕이 아니었다. 아직 뿌리가 약한 세종을 위해 스스로 '바람막이'를 자처한 것이다.
태종의 정치력은 이 상왕 시절에 정점을 찍는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어린 세종을 흔들 수 있는 외척과 공신 세력을 미리 파악해, 자신이 살아있을 때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아들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만한 자들은 가차 없이 제거하며, 피 묻히는 더러운 역할은 오직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는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치밀하고도 비정한 배려였다. 또한 갓 즉위한 세종이 노회한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군사권과 인사권이라는 핵심 권력을 쥐고 뒤에서 강력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세종은 자칫 불거질 수 있는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가장 안전한 온실 속에서 제왕의 길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태종 이방원은 평생을 자신의 '정통성 콤플렉스'와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지긋지긋한 싸움이 아들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스스로 가장 강력하고 악독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이라는 찬란한 꽃은, 태종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거름 삼고, 악역을 자처하며 피워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