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고려 왕 계보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다들 '고려'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지 궁금하다.
아마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후삼국을 통일해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린 나라,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이 싹텄던 시기, 혹은 조선보다는 훨씬 개방적이고 외세의 침략에도 끈질기게 저항했던 강인한 나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 '고려'라는 나라는 알게 모르게 좀 추상적이다. 화려한 유적이 즐비한 삼국시대나, 가장 가깝고 기록도 방대한 조선과는 달리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 덜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문득,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역사는 모름지기 그 나라의 수도였던 현장에 가서 연구를 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려'만은 우리가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참 그렇다. 조선의 서울, 신라의 경주, 백제의 공주와 부여, 심지어 고구려조차 중국의 집안(지안)으로 가면 옛 수도의 흔적을 밟아볼 수 있다.
오직 고려의 수도만이 북한의 '개성'에 있어 갈 수 없다는 사실에, 그토록 답답해하고 아쉬워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 서론은 이쯤 하고. 그 닿을 수 없어 어렴풋하고 추상적이던 고려라는 나라를, 이제 왕실 계보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파헤쳐 볼까 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고려의 시작인 태조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그 500년의 시간을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변두리 송악의 호족, 어떻게 대권을 얻었나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그의 뿌리를 찾으려면 직계 조상인 아버지 용건(왕륭)과 할아버지 작제건을 먼저 알아야 한다.
| 왕건과의 관계 | 이름 | 추존 |
|---|---|---|
| 조부 (할아버지) | 작제건 | 의조 |
| 부 (아버지) | 용건 (왕륭) | 세조 |
이들은 송악, 지금의 개성 일대를 꽉 잡고 있던 호족이었다. 당시 전국에 난다 긴다 하는 호족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왕건 집안이 후삼국 시대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다. 바로 '돈(재력)'과 '칼(무력)'을 동시에 갖춘 하이브리드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송악은 장보고의 청해진이 몰락한 이후 대당 무역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들여와 신라 내륙에 팔고, 반대로 신라의 물건을 수출하며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국제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돈이 모이는 곳엔 늘 위험이 따르는 법. 장보고의 청해진 시절에도 알 수 있듯 당시 바다엔 해적이 들끓었다. 그래서 무역상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체적인 사병, 즉 '군대'를 보유해야 했다.
마침 왕건 집안은 송악을 보호하는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 거점인 '혈구진(강화도)'과도 가까워 긴밀한 연계가 가능했다.
정리하자면 왕건 가문은 무역으로 쌓아 올린 막대한 재력과, 거친 바다에서 해적과 싸우며 단련된 강력한 해군력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왕건, 고려의 태조가 되다
앞서 살펴본 송악 호족의 막강한 재력과 해군력, 이 두 가지 날개를 단 왕건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점령하며 단숨에 2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궁예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그를 몰아내고 918년 마침내 '고려'를 건국한다.
왕건의 진가는 나라를 세운 직후부터 빛을 발했다. 힘으로만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 신라의 경순왕과 후백제의 견훤까지 포용하며 진정한 의미의 후삼국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통일 이후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왕건을 도왔던 전국의 호족들은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과 돈을 쥐고 있었다. 자칫하면 도로 아미타불, 다시 나라가 쪼개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
이때 왕건이 꺼내 든 카드가 바로 '결혼'이었다.
왕건은 전국의 유력한 호족 가문의 딸들과 결혼하며 그들을 자신의 '가족(장인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부인만 29명에 달하는 거대한 가계도는 왕건이 여색을 밝혀서가 아니라, 호족들을 통제하고 내 편으로 묶어두기 위한 처절한 정치적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결혼뿐만이 아니었다. 유력 호족에게는 왕 씨 성을 하사해(사성 정책) 형제처럼 대우해 줬고, 지방 호족의 자제를 수도인 개경에 머물게 하는(기인 제도) 일종의 인질책을 쓰기도 했다.
또한,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만부교 사건'을 통해, "우리는 거란 같은 야만국과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외교적 가이드라인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모든 정치적 노하우는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 <훈요십조>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유훈은 이후 고려 왕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적인 헌법이자, 때로는 왕위 계승 명분을 두고 다투게 되는 씨앗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