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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며 천년 신라의 역사를 마감했다. 흔히 망국의 군주로서 무능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지만, 경순왕은 당시의 엄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신라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보장하고 나아가 후손들이 고려 왕조의 핵심 세력으로 편입되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이는 단순히 나라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라가 가진 정통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현명한 결단이었다. 왜 이런 평가를 하게 되었는지 함께 확인해보자.
2. 배경
927년 경순왕이 즉위했을 당시, 신라는 이미 고대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사방은 후백제와 고려에 둘러싸여 실질적으로는 도시 국가 수준으로 약화되었다.*1 경순왕의 즉위 직전인 927년 10월, 후백제 견훤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침공하여 유린했고, 경순왕의 선왕인 경애왕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2
견훤은 서라벌 유린 후 경순왕을 신라왕으로 옹립했다. 같은 달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가 고려에 대승을 거두며*3 후삼국 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경순왕은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최악의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
3. 전개
3.1. 경순왕 즉위 직후의 국제 정세
경순왕이 즉위한 927년 당시, 한반도 정세는 후백제와 고려의 대결 구도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후백제는 공산 전투의 승리로 기세가 등등했으며, 신라는 국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서라벌 주변만을 겨우 통치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순왕 앞에는 신라의 존속을 위한 중대한 선택지가 놓였다.
망국의 군주로서 끝까지 항전할 것인가, 아니면 왕실과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신라의 태자였던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은 하늘에 달린 것이나, 어찌 천년 사직을 남에게 가벼이 줄 수 있느냐"며 항복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4 그러나 경순왕은 현실적인 판단을 진행했다.
3.2. 후백제 항복 불가의 명분
경순왕은 신라의 항복 시기를 여러 차례 저울질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백제가 후삼국 시대를 주도하던 공산 전투 직후, 후백제에 항복하는 방안을 고려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후백제에 항복했다면 신라는 속국 이하의 취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수도 서라벌이 후백제에 의해 유린당하고 경애왕이 견훤에 의해 살해된 상황에서, 신라인들이 후백제에 나라를 넘기는 행위를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신라 왕실의 정통성과 백성들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정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당시 고려 왕건은 후백제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경순왕이 이 시점에 고려에 항복했더라도, 왕건이 경순왕을 제대로 대접할 여력이 없었다. 경순왕은 이처럼 당대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3.3. 고려 항복 타이밍 포착
930년 1월,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며 후백제와 고려의 대결 구도는 다시 팽팽해졌다.*5 그리고 935년 3월,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6월, 견훤은 고려로 망명하여 왕건에게 귀부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후삼국 통일의 승기는 고려로 확실히 기울었다.*6
경순왕은 바로 이 시점을 포착하여 고려에 항복했다. 이 결정은 신라가 가진 천 년의 정통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고려의 삼국 통일 대업에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는 신라의 항복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정통성을 확보했으며, 이는 고려에게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쐐기를 박는 행위와 같았다.
4. 결과 및 평가
경순왕의 고려 항복은 간단한 투항으로 보긴 어렵다. 경순왕은 시기를 면밀히 기다려 신라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항복 조건으로 본인의 지위 보장, 신라 왕실의 안전, 후손의 번영, 그리고 경주 백성의 보호까지 확보했다.
고려 왕건은 경순왕에게 고려 태자보다 높은 '정승공'의 지위를 부여*7하며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경순왕은 개경에 머물렀으나,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8되어 여전히 경주를 다스릴 권한을 유지했다. 또한 경순왕은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고려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더욱이 경순왕의 사촌 신성왕후 김씨는 왕건과 결혼하여 고려 현종의 조모가 되었다. 현종 이후 고려의 모든 왕이 현종의 후손임을 고려하면, 경순왕의 결정은 신라 왕실의 후손들이 고려 왕조의 핵심 계층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9 이로 인해 신라 지배층은 고려 사회에 안정적으로 흡수되었고, 고려는 통일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내부 혼란을 최소화했다.
경순왕은 천년 왕국의 역사를 마무리한 망국의 군주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당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신라 왕실과 백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이는 유혈 충돌을 최소화하고, 신라의 정통성을 고려 통일의 명분으로 제공하여 왕실의 존속과 후손들의 번영을 확보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따라서 경순왕은 흔히 알려진 무능한 망국의 군주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 신라의 가치를 활용하여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인 현실적이고 현명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겠다.
- *1 당시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력이 미치는 곳은 수도 경주와 영천, 청도 등 경상도 동남부 일대에 불과했다.
- *2 과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기습을 받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무능함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현대 학계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조신에게 나라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3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 김락 등 아끼던 개국공신 8명을 잃고, 본인도 신숭겸의 갑옷을 입고 평복으로 위장해 겨우 탈출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했다.
- *4 항복이 결정되자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마의)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반면 그의 동생(범공)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등 신라 왕실 내부에서도 대처 방식이 갈렸다.
- *5 고창은 현재의 경북 안동이다. 이때 왕건을 적극적으로 도운 안동의 호족 세 명(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 *6 자신이 직접 세운 나라의 왕위를 두고 아들들과 내전을 벌이다가, 평생의 숙적이었던 왕건에게 목숨을 의탁하게 된 후삼국시대 최고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 *7 당시 왕건이 경순왕을 대할 때 신하의 예가 아닌 '빈객(귀한 손님)'의 예로 대우했으며, 조회에서도 태자보다 윗자리에 서게 할 만큼 파격적인 대우였다.
- *8 이는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최초 시작이 되었다. 고려는 이를 통해 지방 세력을 통제하면서도 신라 지배층에게 해당 지역에 대한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다.
- *9 즉, 제8대 현종 이후의 고려 국왕들은 모두 신라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셈이다. 이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신라는 망했지만, 신라의 핏줄이 끝까지 고려를 지배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