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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가계도롤 살펴보기에 앞서
많은 사람이 철종을 강화도에서 농사짓다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으로만 안다. 극적인 신데렐라 서사로 포장된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사실에 불과하다. 철종 즉위는 조선 왕실 혈통의 고갈과 세도정치의 극단적 모순이 빚어낸 결과였다.
오늘날 대중에게 각인된 '강화도령'이라는 무지한 시골뜨기 이미지 역시, 실상은 안동 김씨 세력이 철종의 통치 능력을 깎아내리고 왕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덧씌운 정치적 프레임의 산물이다.
몰락한 왕족, 이원범
철종의 본명은 이원범이다. 이원범 가계는 이미 왕실 내에서 철저히 배제된 몰락한 왕족에 불과했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장남 상계군 역모에 엮여 강화도로 유배됐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에는 은언군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 생부 전계대원군 역시 그 여파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감내하며 숨죽여 지내야 했다.
이원범 본인은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14세 때 맏형 이원경의 역모 연루로 둘째 형 이경응과 함께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됐다. 왕위 계승은 고사하고, 종친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강화도 산속에서 낯선 가마 행렬을 보고 금부도사로 착각해 도망쳤다는 일화는 당시 이원범이 처했던 극도의 생존 위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가 왕을 선택했나?
1849년, 헌종이 21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력을 쥔 외척이 새로운 왕을 정해야 했던, 그 치열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따라가 본다. 당시 물망에 오른 유력 후보는 이원범(19세), 이하전(8세), 이하응(30세), 이경응(22세)이었다.
명분상 가장 앞선 인물은 이하전이었다. 그는 덕흥대원군의 13대손으로 촌수는 멀었으나, 항렬상 헌종의 조카뻘에 해당해 종법 질서에 가장 부합했다. 풍양 조씨 세력인 권돈인 등도 그를 지지했다.
반면 훗날 흥선대원군이 되는 이하응은 왕위에 오르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세도 가문의 눈을 피해 몸을 한껏 낮추고 있던 터라 후보군에서 밀려났다. 이원범의 둘째 형 이경응 또한 22세의 성인으로, 수렴청정을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안동 김씨 일파의 최종 선택은 19세 청년 이원범이었다. 제왕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정치적 기반마저 완전히 거세된 그는, 외척이 권력을 통제하고 유지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정국을 장악한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이원범을 헌종의 할아버지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무리수*1까지 두며 즉위를 강행했다. 왕실의 정통성이 무너지고, 국왕의 임명조차 특정 가문의 셈법에 의해 결정되던 세도정치의 단면이다. 이후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지녔던 후보 이하전은 안동 김씨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다가 끝내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
철종은 정말 강화도령이었나?
흔히 철종을 평생 농사만 짓다 왕이 된 '강화도령'으로 기억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철종은 14세까지 한양에서 성장*2했으며, 강화도에서 생활한 기간은 5년 남짓이다. 학문이 부족한 '시골뜨기'라는 이미지는 철종의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외척의 국정 장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동 김씨 세력이 이용한 측면이 크다. 왕을 무력한 존재로 묶어두어 강력한 왕권을 꿈꾸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실록 속의 철종은 마냥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1862년 임술민란이 발발하자, 철종은 안핵사 박규수의 건의*3를 수용하여 삼정의 폐단을 개혁할 특별 기구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이는 나름의 정무적 판단력과 국정 쇄신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삼정의 문란을 통해 부를 축적하던 안동 김씨 등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철종의 개혁 의지는 세도 가문의 조직적인 저항을 넘어서지 못했고, 삼정이정청은 설치 3개월여 만에 폐지*4되었다.
유일한 개혁 시도마저 기득권의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이후 철종은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었고,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눈을 감았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맞이한 쓸쓸한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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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적 종법 질서에서 왕위 계승은 아들이나 조카 등 아랫세대가 뒤를 잇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만 계승자가 전임 국왕의 제사를 올바르게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종은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항렬이 같은 '아저씨(7촌 당숙)'뻘이었다. 아저씨가 조카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유교 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헌종의 뒤를 바로 잇는 것은 예법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을 헌종이 아닌, 자신의 남편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편법을 썼다. 억지로 족보를 끌어올려 철종을 헌종의 아버지가 아닌 '형제' 항렬로 만든 것이다. - *2 이미지와는 다르게 철종은 서울사람(?)이다. 1831년 한양 경행방 본가에서 태어나 1844년 유배될 때까지 한양에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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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때 철종에게 삼정이정청 설치를 건의한 인물은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잘 알려진 박규수다.
훗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해결하고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는 그 사람이다. 철종 대 진주민란 당시 안핵사로 파견되어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음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
*4
삼정이정청은 설치 3개월 만에 폐지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예견된 실패였다.
당시 삼정의 문란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던 정점이 바로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대상인 이들에게 개혁의 실무를 맡긴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