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계보12 - 순조, 효명세자, 헌종 가계도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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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효명세자, 헌종 가계도 알아보기에 앞서

정조가 다져놓은 왕실의 중심과 중흥의 기틀은 안타깝게도 온전히 이어지지 못했다. 그 직계를 이은 효명세자와 헌종은 모두 개혁을 향한 강한 의지를 품었으나, 권력의 정점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여 만에 각혈로 쓰러졌고, 헌종은 친정을 시작한 직후 병세가 깊어졌다. 두 사람 모두 정조를 빼닮은 개혁 군주로 기대를 모았기에, 이들의 이른 죽음은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 연이은 요절은 조선 왕실의 운명마저 바꿔놓았다. 정조의 개혁 정신을 계승하려 했던 두 사람의 짧은 생애와 그들이 마주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따라가 본다.

준비된 후계자의 효명세자의 요절

1827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난 헌종은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유일한 아들인 효명세자의 독자였다. 당시 순조의 깊은 신임 속에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는 개혁과 왕권 강화에 매진하며 조정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830년, 22세의 나이에 고열과 각혈로 급서하면서 왕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헌종은 정조, 순조, 효명세자로 이어지는 직계 혈통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되었다. 결국 1834년 순조가 승하하면서, 헌종은 불과 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왕의 자격은 주어졌으나 정사를 돌보기엔 지나치게 어렸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1되었다. 이는 순조 즉위 초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다를 바 없는 ‘어린 국왕과 수렴청정’ 체제*2가 반복되었으며, 권력의 실체가 왕을 떠나 외척과 원로들에게 집중되는 조선 후기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헌종, 왕권을 되찾으려 하다

1841년, 15세의 헌종은 비로소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소화 불량과 부종 등 잔병치레가 잦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후사를 잇기 어려울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헌종은 실추된 왕권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군권 장악이었다. 정조 시대의 장용영을 계승하는 친위 조직 ‘총위영’을 창설하여 오군영 체제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했다. 헌종은 외척들이 꽉 잡고 있는 훈련도감을 직접 통제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고, 훈련도감의 병력과 재정을 일부 빼앗아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인 '총위영'으로 이관시키는 우회 전략을 택한 것이다.*3


동시에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적극 활용해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의 독주를 견제했다. 안동 김씨 핵심인 김흥근 등 권신들을 향한 대간의 탄핵을 직접 승인하고, 유배 중이던 반대파를 복귀시키며 정치적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또 헌종은 안동 김씨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조인영 등) 세력을 일시적으로 활용하거나, 권돈인 같은 인물을 정승에 앉히고 자신의 처가(남양 홍씨) 세력을 끌어올리는 등 정파 간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인사 정책을 주로 펼쳤다


지방 행정에도 개입해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수령의 비리를 뿌리 뽑으려 했으나, 비변사의 비협조와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다각적인 개혁을 추진했지만, 신체적 한계와 고립된 정치적 환경은 큰 장벽이었다.

헌종의 승하와 끊어진 직계 혈통

강력한 왕권 회복의 의지를 좌절시킨 결정적 요인은 결국 건강이었다. 헌종은 본래 비위가 약해 만성적인 소화 불량에 시달렸고, 병약한 몸을 추스르기 위해 꾸준히 탕약을 복용하며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20대에 접어들며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극심한 피로감과 함께 얼굴과 사지가 심하게 붓는 중증 부종이 반복되었고, 호흡마저 가빠지는 등 옥체가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처럼 건강이 무너지며 국정 운영은 점차 한계에 부딪혔고, 간신히 억눌러두었던 권력의 무게추는 자연스레 다시 외척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말았다.


1849년, 헌종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생을 마감했다.*4 효현왕후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를 차례로 맞이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고, 후궁 경빈 김씨 사이에서 얻은 옹주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을 살아남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면서, 정조의 손자로부터 이어지던 조선 왕실의 직계 혈통은 헌종 대에 이르러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왕위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철종*5에게 넘어갔고, 이는 왕실의 정통성이 깨지고 방계 혈통이 권력 구조의 중심에 서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 *1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수렴청정을 거둔 인물이다.

    8세에 즉위한 손자 헌종을 위해 처음 수렴을 드리웠고, 훗날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강화도에서 데려온 철종을 왕위에 올린 뒤 다시 한번 수렴청정을 맡았다.
  2. *2 조선 시대에 수렴청정을 한 대왕대비(또는 왕대비)는 총 6명이다.

    - 세조의 비 정희왕후 (성종 대)
    - 중종의 비 문정왕후 (명종 대)
    - 명종의 비 인순왕후 (선조 대)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순조 대)
    - 순조의 비 순원왕후 (헌종, 철종 대 - 유일한 2회)
    - 익종(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 조대비 (고종 대)
  3. *3 총위영은 헌종의 죽음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1849년 헌종이 2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마자, 실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신들은 곧바로 총위영을 혁파하고 병력을 기존 군영에 통폐합시켰다.
  4. *4 헌종과 그의 아버지 효명세자는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비극적인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병증은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 효명세자는 22세의 나이에 심한 각혈을 하며 급서한 반면, 아들 헌종은 21세(만 나이)에 만성적인 위장병과 사지가 심하게 붓는 극심한 부종으로 생을 마감했다.
  5. *5 정조의 직계가 완전히 끊어지면서 왕위를 이은 철종은 촌수로 따지면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된다.

    유교 예법상 아저씨가 조카의 양자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철종을 헌종의 할아버지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했다.

    촌수와 항렬마저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 만큼, 당시 왕실의 후사 부족했던 것이다.(강화도에서 농부로 살던 철종을 데려온 것도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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