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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조는 흔히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받지만, 실제 그의 재위 기간은 수차례의 암살 시도와 역모, 측근의 배신이 끊이지 않은 치열한 정치 투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정조의 왕권과 생명을 위협한 핵심 세력이 외가인 풍산 홍씨를 비롯한 친인척이었다는 점은 정조 시대 정치사의 큰 특징 중 하나다. 선대 왕인 영조와 사도세자로부터 비롯된 정통성 논란은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가장 큰 정치적 취약점으로 작용했다.
정조의 생모는 풍산 홍씨 가문의 혜경궁 홍씨였으나, 정조의 즉위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세력 역시 풍산 홍씨를 비롯한 외척이었다. 영조 말기, 혜경궁 홍씨의 숙부(정조의 진외종조부)인 홍인한은 사도세자의 여동생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결탁하여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막고 즉위를 방해한 대표적인 척신*1이었다.
정조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발생한 '정유역변'은 이러한 외척 세력의 반발이 극에 달한 사건이다. 남양 홍씨 가문의 홍상범 등이 주도한 이 사건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 한 역모*2였다.
자객이 정조의 침전인 존현각 지붕까지 침투*3했으나, 평소 암살 위협으로 극심한 불면증을 겪던 정조가 밤늦게까지 깨어 책을 읽고 있었던 탓에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 등 척신 세력을 숙청하여 기선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은 왕실의 또 다른 핏줄을 앞세워 지속적으로 정조의 정통성을 위협했다.
측근 홍국영의 대두와 권력 남용
외척과 반대파의 지속적인 위협 속에서 정조가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선택한 인물은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보위한 측근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임하며 정조 초기의 왕권 강화와 반대파 숙청을 주도한 핵심 공신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며 스스로 척신화되는 행보를 보였다. 원빈이 입궁 1년 만에 병사하자,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입적시켜 '완풍군'이라 칭하고, 그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는 무리수를 두었다.*4
정조의 정비(효의왕후)가 아직 젊어 후사를 이을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가 후계 구도에 자의적으로 개입한 것은 명백한 권력 남용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결국 정조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을 실각시키고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5
이복형제들의 숙청과 정통성 딜레마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역모 사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사도세자의 핏줄, 즉 정조의 이복형제들이 반대파들의 추대 대상으로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혈육을 처벌해야 하는 정치적 딜레마에 빠졌다.
은전군은 앞서 언급된 정유역변에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결국 사사되었다. 또한 홍국영의 전횡에 아들(상계군)을 이용당했던 이복동생 은언군 역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정조는 신하들의 거센 처벌 요구에 맞서 단식을 불사하면서까지 은언군의 처형을 막고자 했으나, 결국 정치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강화도(교동도)로 유배 보내야 했다.*6
은전군과 은언군은 본인들이 직접 역모를 주도했다기보다는 반대파들의 정치적 명분으로 이용된 희생양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정조가 이들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한 이유는 정조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명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모에 연루된 형제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호할 경우, 반대파들에게 "국왕이 역적 세력을 옹호한다"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 왕위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릴 위험이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자신의 왕권과 사도세자의 명예를 방어하기 위해 살아있는 형제들을 정치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최측근조차 과감히 쳐냈던 국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성과 혈육이 얽힌 구조적 모순 앞에서는 철저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조라는 개인을 철저히 고립되게 만든 조선 후기 정치사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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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우의정이었던 홍인한은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며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웠다.
즉, "동궁(세손)은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누가 하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도 알 필요가 없다"는 망언이었다.
이는 국왕의 후계자에게 국정에 관여하지 말고 허수아비로 있으라는 의미였기에, 정조는 즉위 직후 이 발언을 명분 삼아 홍인한을 철저히 숙청했다. -
*2
은전군은 사도세자와 후궁 경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로, 정조에게는 이복동생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불과 3세였던 그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정유역변 당시 반대파의 추대 대상으로 이름이 오르내렸을 뿐 역모에 직접 가담한 증거는 없었으나, 왕실의 엄격한 연좌제와 신하들의 거센 합사(집단 상소) 압박에 밀린 정조는 결국 1778년 그에게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은전군의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
*3
이른바 정유역변(1777). 조선 왕조 역사상 왕의 침전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자객이 도달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자객 전흥문 등은 경희궁 지붕 위로 잠입해 기와를 뜯어내고 침입하려 했으나, 늦은 밤까지 정조가 책을 넘기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려 거사 시기를 놓쳤다.
이 사건 이후 정조는 경희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홍국영을 대장으로 하는 숙위소(왕실 친위대)를 창설하게 된다. -
*4
홍국영이 권력을 잃게 된 결정적 계기다.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입궁 1년 만에 병사하자, 권력의 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담)을 죽은 누이의 양자로 삼았다.
더 나아가 상계군을 왕의 대를 잇는다는 뜻의 '완풍군(完豊君)'으로 봉하고 사실상의 세자로 만들려 했다. 아직 정조가 20대 후반으로 젊고 후사를 볼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신하가 차기 왕위 계승자를 자의적으로 지명한 것은 명백한 역모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 *5 참고로, 풍산 홍씨 가문 전체가 정조와 대립한 것은 아니다. 외조부 홍봉한은 반대파의 거센 탄핵 속에서도 정조의 묵시적 보호 덕분에 간신히 정계에서 버틸 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아들의 왕권을 위해 친정의 몰락을 방관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정조의 가계도 안에는 그를 조력하는 세력과 위협하는 세력이 복잡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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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평생을 반대파의 표적이 되었다. 정조는 동생을 끝까지 살리려 노력했으나 아들 상계군의 역모 혐의로 결국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정조 사후, 순조 즉위 원년(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당시 그의 부인(상산군부인 송씨)과 며느리(상계군의 처)가 천주교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면서, 은언군은 결국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