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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는 혜공왕을 끝으로 무열왕계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대인 '하대(下代)'에 진입했다. 김헌창의 난(822년)은 이 시기 발생한 가장 거대한 정치적 지진이었다. 흔히 이 난은 아버지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한 '가문의 복수'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상은 헌덕왕 대에 이르러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김헌창 본인의 정치적 소외와 위기감이 빚어낸 거대한 내전이었다. 국토의 절반을 장악했던 이 반란이 진압되면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무열왕계는 왕위에 도전할 명분과 동력을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2. 배경
무열왕계의 혈통이 끊기자 신라의 왕위 계승전은 격화되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내물왕계 김경신(원성왕)과 무열왕계 방계 김주원의 충돌이었다. 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자신의 연고지인 명주(지금의 강릉)로 물러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원성왕은 경쟁자를 숙청하는 대신 '명주군왕'이라는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이미 신라 중앙 정부가 막강한 사병과 재력을 갖춘 거대 지방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권력의 균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3. 전개
3.1. 반란의 통념적 원인과 실제
김헌창의 난은 일반적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 김주원의 한을 풀기 위한 복수극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시기적으로 큰 모순을 안고 있다. 김주원이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시점과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시점 사이에는 무려 37년이라는 큰 시간적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실제로 김헌창은 아버지의 패배 이후에도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시기를 거치며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헌덕왕 초기에는 권력 2인자 자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후 헌덕왕 측근 세력의 견제에 밀려 무진주, 청주, 웅천주(공주) 등 지방 도독으로 계속해서 좌천당했다.*1 철저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을 전전하게 된 김헌창은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반란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3.2. 반란 주도 세력의 기반
822년,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김헌창은 웅진(공주)을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칭하고, '경운(慶雲)'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까지 선포*2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권력을 빼앗으려는 단순 반란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내물왕계가 장악한 기존의 신라를 전면 부정하고,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잇는 완전히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 전례 없는 내전이었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고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지방 곳곳에는 여전히 내물왕계의 집권을 '정권 탈취'로 인식하고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잠재적 세력들이 널리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3. 지방 세력의 지지
김헌창이 거병하자 신라의 9주 5소경 중 무려 4개 주(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와 3개 소경이 그에게 동조했다. 신라 국토의 절반 이상이 김헌창의 깃발 아래 모여든 것이다. 이는 내물왕계 중심의 중앙 정부가 지방의 광범위한 불만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김헌창의 난이 이토록 거대한 지지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존재한다. 거병의 중심지(공주, 전주, 광주 등)가 과거 백제의 영토였음을 들어 신라 중앙에 대한 '백제 유민들의 반발 심리'를 자극했다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또한, 경주 진골 귀족들만의 폐쇄적인 권력 독점 구조 속에서 철저히 소외감을 느꼈던 지방 세력들이 '무열왕계의 정통성 회복'이라는 김헌창의 명분에 적극적으로 편승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4. 결과 및 평가
나라가 반쪽으로 쪼개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헌덕왕이 이끄는 신라 중앙군은 총력을 다해 김헌창의 난을 속전속결로 진압했다. 결국 김헌창은 웅진성에서 자결하며 거대한 내전은 한 달여 만에 막을 내렸다. 이 반란의 실패를 기점으로, 신라 전성기를 호령했던 무열왕계는 왕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명분과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3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흔히 '신라 하대'라고 하면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무기력한 '혼란기'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국토의 절반이 넘어간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을 이토록 단기간에 진압해 낸 신라 중앙군의 모습을 보면, 통일신라 전성기에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과 국가 군사 시스템이 이 시기까지도 굳건하게 살아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김헌창의 난은 신라 사회에 묵직한 경고를 남겼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헌창이 장악했던 지역의 지도를 보면 놀랍게도 훗날 후백제가 세워지는 옛 백제 권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는 경주 중심의 진골 귀족 체제에 대해 억눌려 있던 지방 세력의 불만이 언제든 국가를 반으로 쪼갤 수 있을 만큼 거대해졌음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요컨대 김헌창의 난은 무열왕계와 내물왕계의 귀족 간 권력 투쟁을 넘어, 훗날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지방 호족들이 창궐하고 마침내 '후삼국 시대'로 분열되고 마는 신라 말기의 비극을 미리 보여준 불길한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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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김헌창은 아래의 이력을 지녔다.
- 애장왕 8년(807) : 시중(중앙)
- 헌덕왕 5년(813) : 무진주 도독(지방)
- 헌덕왕 6년(814) : 시중(중앙)
- 헌덕왕 8년(816) : 청주 도독(지방)
- 헌덕왕 13년(821) : 웅천주 도독(지방)
- 헌덕왕 14년(822) : 김헌창의 난
이들 지역은 김헌창의 난 때 동조한 곳이기도 하다. -
*2
신라가 진덕여왕 대(650년)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받아 쓰며 외교적 관계를 굳힌 이후, 신라 땅에서 '독자 연호'가 부활한 것은 약 170년 만의 일이다. 김헌창이 '경운(慶雲)'이라는 연호를 선포한 것은 당나라 연호를 따르던 경주 조정과의 완전한 단절이자, 스스로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임을 선언한 것이다.
흥미로운 모순은 그가 세운 새 나라의 국호가 하필 당나라의 수도와 같은 '장안(長安)'이었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단순히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좋은 뜻으로 썼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기존 신라를 대체할 선진 제국이다"라는 것을 표방하여 당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던 고도의 외교적 네이밍으로 보는 시각도 유력하게 제기된다. -
*3
신라가 진덕여왕 대(650년)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받아 쓰며 외교적 관계를 굳힌 이후, 신라 땅에서 '독자 연호'가 부활한 것은 약 170년 만의 일이다. 김헌창이 '경운(慶雲)'이라는 연호를 선포한 것은 당나라 연호를 따르던 경주 조정과의 완전한 단절이자, 스스로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임을 선언한 것이다.
흥미로운 모순은 그가 세운 새 나라의 국호가 하필 당나라의 수도와 같은 '장안(長安)'이었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단순히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좋은 뜻으로 썼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기존 신라를 대체할 국가다"라는 것을 표방하여 당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던 고도의 외교적 네이밍으로 보는 시각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