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계보10 -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가계도와 원 간섭기 고려 왕의 숙명 알아보기

👑 역대 왕조 가계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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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고려왕계보를 보기 앞서

우리는 흔히 '일제 강점기'와 '원 간섭기'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고려는 왕이 항복까지 했는데도 식민지가 아닌 '간섭'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을까?


그 답은 지난 시간 살펴본 '충선왕'의 정체성에서 짐작할 수 있다.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이자 고려의 왕. 두 나라의 핏줄을 모두 가진 존재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들은 완전한 고려 사람도, 완전한 몽골 사람도 아닌 경계인이 되었다.


원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나라를 없애지 않더라도, 이 '혈연'이라는 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인 '간섭'과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 입장이 아니라, 통제를 받는 고려의 입장은 어땠을까? 과연 원 간섭기 고려 왕에게는 어느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을까?

친조의 일상화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현종 시절로 가보자.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을 가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거란이 물러가는 조건으로 내건 것이 바로 국왕 현종의 '친조(親朝)'였다.


친조란 제후가 황제를 직접 찾아가 알현하는 행위인데, 말이 좋아 알현이지 사실상 '항복'을 의미한다. 항복 자체도 굴욕적이지만, 적은 수의 호위 병력만 대동하고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현종이 온갖 핑계를 대며 끝까지 친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오죽하면 훗날 조선의 인조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보다, 청나라가 "직접 조선 왕이 친조하라"고 할까 봐 더 무서워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원 간섭기 고려에서 이 '친조'는 그저 일상이 되었다. 이미 항복한 나라의 처지니, 원나라에서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고려 왕은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야만 했다. 이건 정중한 요청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소환 명령'이었다.

고려판 연산군에겐 반정도 필요없었다

굴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혹시 한국사 최악의 폭군이라 불리는 연산군보다 더한 악행과 기행, 패륜을 일삼았던 '충혜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만약 충혜왕이 조선 시대 왕이었다면 결말은 뻔했을 것이다. 신하들이 들고일어나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처럼 왕을 갈아치웠을 테니까.


하지만 원 간섭기 고려의 해결 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려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이자 간신이었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게 충혜왕의 미친 짓을 고자질한 것이다. 그러자 원 황제는 충혜왕을 즉시 원나라로 소환해 폐위시켜 버렸다.


평범한(?) 폐위가 아니었다. 막장의 끝을 달리던 충혜왕을 본 원나라 황제는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비록 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결국 충혜왕은 유배를 떠나던 길에 객사했고, <고려사>에는 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백성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 황제의 손바닥 위에 놓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마저 원나라 황제의 말 한마디, 기분 하나에 따라 결정되던, 그야말로 '파리 목숨'과도 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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