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과 해자, 그리고 무너진 시간
오사카로 향하는 열차는 오후의 햇빛을 뚫고 달렸다. 창밖으로 흐르는 논과 강, 공장지대의 굴뚝과 고가도로를 지나며 계절은 서서히 여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메다역에 내리자, 도시의 열기가 피로처럼 따라붙었다. 콘크리트 건물들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바람은 탁했고, 사람들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마치욘초메 역에서 내렸다. 오사카성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이었지만, 그 거리는 숫자보다 길었다. 이파리가 만개한 나무들 아래로, 묵직한 그림자들이 길을 덮고 있었다. 공원의 경계를 넘자마자 도시의 음영이 꺾이고, 갑자기 수백 년 전의 기척이 숨죽인 채 다가왔다.
해자는 예상보다 넓고 깊었다. 물은 짙은 녹색으로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돌로 쌓인 성벽이 기울 듯 솟아 있었다. 그 돌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조선 도공들의 손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손때가 아닌 전쟁의 결과로 쌓인 돌들은, 세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나다마루가 있었다. 성 남쪽에 설치된 그 방어 거점은 지금은 작은 기념비와 지형만이 남아 있다. 사나다 유키무라가 마지막까지 버텼던 그 자리. 나는 그곳에 서서 멈추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함성, 보이지 않는 피. 그러나 땅은 알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이 엉겨 붙었던 순간의 무게를. 흙은 그 피를 기억하고 있었고, 돌은 그 욕망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히데요리의 그림자와 영원의 부재
천수각은 성 내부 중심에 자리한 듯했지만, 역사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었다. 도쿠가와가 재건한 지금의 천수각은 도요토미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지웠고, 우리는 그 잔해 위에서 다시 본다. 천수각에 올랐지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보다 해자 아래 돌에 깃든 비애가 더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히데요리는 패했고,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성 안 깊은 어딘가, 그들이 몸을 기댄 돌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투의 끝은 화해가 아닌 소멸이었다. 도요토미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져야 했던 정권 교체의 논리. 히데요리는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천하를 쥐었던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돌은 그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해자가 남았다. 그것들이 아무 말 없이 서 있다는 것이, 곧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오래 그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아이스크림을 들고 지나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몇 십분 생각에 잠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비가 내릴 듯 공기가 무거워졌다. 늦은 밤, 창밖으로는 고층 건물의 불빛이 멀게 흘렀고,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이 손에 닿았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마셨다. 전날 전국을 재패했던 도요토미 가문처럼 인생이 덧 없는 건 아닐까? 아니,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에 더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