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역사 여행 ✧ '페리공원'과 '개항자료관'에서 쿠로후네의 흔적을 따라가다


페리공원: 페리 제독이 처음 상륙한 일본 개항의 시작점

페리공원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읽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 속 이야기로만 보던 페리 제독의 상륙 장소를 직접 걸어보면 어떤 기분일까? 갑작스러운 충동이었지만, 그런 충동은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곤 한다. 그렇게 나는 한여름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약 한 시간 반 거리, 조용한 항구 마을 케이큐쿠리하마(京急久里浜)로 향했다.

전철역에서 페리공원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가는 길은 관광지 느낌은 전혀 없이, 정말 평범한 주택가였다. 고양이 한 마리 느긋하게 길을 건너고, 마을 초등학교 옆길을 따라가다 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 느낌은 '정말 여기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기대감을 더 키웠다.

공원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늘 아래 앉은 노인들, 줄지어 늘어선 푸드트럭,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 하지만 공원 한가운데에 우뚝 선 거대한 비석은 이곳이 단순한 동네 공원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미합중국 해군 제독 페리 상륙 기념비’—바로 이 자리가, 일본 근대사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공원 한쪽엔 작고 소박한 페리기념관이 있었다. 2층짜리 건물 안에는 페리 함대의 쿠로후네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다를 봉쇄한 당시 함대의 모습, 일본에 전달된 미국 대통령의 친서, 그리고 개항 협상을 둘러싼 긴장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곳에서 일본은 근대와 마주했고, 역사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기념비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이 비석은 철거되었다가, 전쟁 이후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일본과 미국, 두 나라의 복잡한 관계가 비석 하나에도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한 시대의 상징, 그 무게가 지금도 이 공원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요코하마 개항자료관: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살아있는 역사 공간

페리공원을 뒤로하고 전철을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더 이동해 도착한 곳은 요코하마(横浜)였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항구도시이자, 지금은 세련된 국제도시로 자리 잡은 곳. ‘슬램덩크’의 무대이기도 하고, 일본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답게 도심 분위기마저 활기가 넘쳤다.

역사 탐방의 두 번째 목적지인 요코하마 개항자료관은 옛 영국 영사관 건물을 활용한 공간이었다. 외관부터 고풍스러웠고, 내부에는 일본 개항 당시의 각종 문서와 모형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조약 체결 현장에 있었던 ‘타마쿠스의 나무’였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 당시의 목격자이자, 지금까지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이 자료관을 나서면 바로 앞에 요코하마 국제여객터미널이 펼쳐진다. 해변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여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도시와 바다,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어우러진 공간. 그 풍경은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면이었다.

이번 여정에서 느낀 건 하나였다. 일본은 ‘개항’을 기억하고, 심지어 기념한다. 반면 우리는 그 단어 자체에 거부감이 남아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의 역사는 다르지만, 인천이나 군산, 부산처럼 항구도시가 가진 정체성을 되살리려면, 우리도 언젠가는 '개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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